다시 겨울공화국에서
-시를 사랑하는 딸에게 2
활활타고 있는 연탄.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네가 있는 태평양 한 가운데 나라는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날씨겠구나. 여름바다는 늘 젊음의 기운으로 뜨겁지. 늘 사람들로 넘쳐나고 파도는 그 기운을 받아 더욱 거침없이 몰아치면서 싱싱한 근육들을 자랑하겠지. 예전에 캘리포니아 앞바다에서 서핑을 하는 청춘들을 보면서 한 없이 부러웠던게 생각나는구나.
서울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겨울바다라도 가고 싶지만 충동적으로 바다로 달려가던 혈기가 나에게서 떠나갔는지 마음만 있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구나. 안타깝게도 철이 든 건지도 모르지만. 청춘의 한 시절 술 한 잔 하다가 충동적으로 부산행 심야기차에 몸을 싣고 광안리와 해운대까지 내달렸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 해 겨울 만난 광안리 앞바다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뛰지만 제대로 옷도 챙기지 않고 준비없이 떠난 여행길이어서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오늘 사랑하는 딸의 나라이자 나의 나라는 마치 백척간두에 서 있는 돛단배처럼 위태롭다. 정치인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이전투구를 거듭하고 있고, 파이팅 넘쳐야할 경제인들은 내년 우리 경제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면서 한 숨 짓고 있다. 아버지의 세대에서 너무나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나와 내 이웃을 살피지 않고, 쓸데없는 자만심에 빠져 살아온 세월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폭풍이 지나면 잔잔한 바다가 찾아오듯이 우리가 이 홍역을 좀더 혹독하게 치루는게 나을 지도 모른다.
이런 시절에 시를 이야기하는게 어줍잖을 수도 있겠다. 한 편으로는 어렵고 힘든 시절일수록 글이 주는 힘을 믿기에 겨울이면 떠오르는 시들을 모아봤다.
…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두고
언 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일찍이 양성우 시인이 쓴 ‘겨울공화국’이라는 시의 일부다. 1975년 서글퍼런 박정희 독재정권 밑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면서 쓴 이 시로 시인은 다니던 학교에서 해고된 뒤 끝내 정권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혀 구속되기도 했단다. 그런데 말이다. 40여년 전에 쓰여진 이 시가 여전히 현재형으로 읽힌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아버지 박정희의 나라 시어가 딸 박근혜의 나라 시어와 달라진 게 없다니 더욱 슬프다.
그래도 겨울은 추위 속에서도 서로 나누고 보듬을 수 있는 힘이 숨 쉰다는게 아름답다. 안도현의 시 ‘연탄 한 장’은 너도 읽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시인의 따스한 가슴이 아름다워서 눈물 짓게 하는 시가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씁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안도현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저쪽에서 뜨끔함이 느껴지는 건 자격지심만은 아닌 듯하다.
겨울이 깊어지면 언젠가 봄이 온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연말과 새해를 맞는 우리들이 시간이 마침 겨울과 맞물려 있다는 건 어쩌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세밑의 추위가 없다면 어쩌면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이웃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노동시인 박노해는 ‘겨울사랑’이라는 시에서 겨울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시라는 게 참 묘해서 시구절이 느닷없이 좋아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헤어진 연인들에게 대중가요가 다 내 얘기처럼 들리면서 미치도록 그 노래에 빠지는 경우가 비슷하다고 할까. 언젠가 폭설이 내린 대관령을 넘다가 떠올린 시 한 편이 있다.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라는 시인데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시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둣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꿇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백색의 계엄령’이라는 표현이 가슴을 짠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 생각나는 시도 있다. 황지우 시인의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시인데 일찍이 이처럼 빛나는 시는 자주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화 13도
영화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은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이제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매양 기쁘지만은 않다. 우리가 받아들 또 하나의 반짝이는 365개의 은화가 재앙이 되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쓰다보니 전반적으로 좀 암울한 이야기가 됐구나. 크리스마스 트리와 산타클로즈 이야기로 가득 채워서 행복한 연말연시가 됐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딸아. 아플때는 그 심연까지 내려가봐야 아픔의 깊이를 알고 언젠가 그 아픔이 힘이 살아가는 힘이 될 때가 있더구나. 살아가는 일은 늘 축제만은 아니기에 언젠가 닥칠 슬픔이나 어려움, 절망 따위와 싸울 힘을 비축해야 할때도 있다. 이제 곧 너를 만날 수 있겠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기꺼이 프로메테우스가 디어 거대한 바위를 감당하면서 버틸 수 있단다.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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