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의 탁월한 여가수들
신중현,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비틀즈가 서양 팝음악 역사의 분기점이라면 신중현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분기점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은 신중현 이전의 음악과 신중현 이후의 음악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여명기 한국대중음악은 신중현으로 인해 눈뜨고, 신중현으로 인해 발아했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전세계 음악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60년대 한국땅에도 신중현과 같은 싱어송라이터가 있었다는 건 기이한 일이다.
신중현의 출발은 소위 미8군 무대에서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한국에 주둔해오던 미군들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만 하고 있기에는 피가 뜨거웠다. 그러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대중음악으로는 그들의 욕구를 달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주한 미군들이 여가를 위해 출입했던 전용클럽을 통칭하여 ‘미8군 무대’로 불렸다. 1950년대말부터 기타 한 대 들고 재키, 히키 등의 예명으로 미8군 무대를 누볐던 이가 신중현이다.
■이정화, 김추자, 김정미 신중현사단의 여가수들
신중현 사단은 일찌감치 미8군 무대에서 서양의 록과 재즈 등을 다양하게 수혈한 그가 한국적인 색채를 가미한 음악을 발판으로 데뷔시킨 가수들을 통칭한다. 신중현 사단의 첫테이프는 그를 리더로 하여 결성된 록그룹 애드 훠(Add 4, 1964)가 끊었다. 화려한 사이키델릭록을 바탕으로한 에드 훠의 노래는 소위 뽕짝으로 부르는 트로트가 주도하던 이전의 노래들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은 명곡의 반열에 오른 ‘빗속의 여인’을 발표했지만 팬들은 냉담했다. 트로트에 길들여졌던 기성세대는 물론 팝송에 매료됐던 젊은층들에게도 신중현의 음악은 너무 앞서갔던 것이다.
이후 신중현은 생계를 위해 미8군 등의 무대에 서기 위해 싱어로 할동할 여가수를 찾았다. 이정화, 김추자, 김정미 등이 바로 그들이다. 신중현이 종로5가의 한 살롱에서 만나 데뷔시킨 이정화는 옐로보이스가 인상적인 여가수였다. 신중현이 소위 사이키델릭록을 앞세워 ‘봄비’‘꽃잎’등을 담아 발표(1967년)했지만 대중성을 획득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정화는 훗날 이선희가 불러 크게 히트한 신중현의 곡 ‘아름다운 강산’을 처음 불렀던 가수이기도 하다.
신중현을 세상에 알린 첫 히트작은 1968년 펄시스터즈의 '님아!'다. 신중현에게 편곡을 부탁하고자 찾아온 펄시스터즈(배인숙, 배인순 자매)는 그에게 음악 이론과 창법을 사사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었던 당시 신중현은 베트남 미군기지 공연 모집에 지원, 펄시스터즈와의 작별을 앞두고 '님아!' '커피 한잔'이 수록된 음반을 취입했다. 그러나 신중현은 이 음반이 히트하면서 베트남행을 포기했다. 걸그룹의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펄시스터즈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탄력있는 몸매로 TV에 출연, 파격적인 안무까지 선보이면서 당대에 뭇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김추자.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이어 등장한 김추자와 김정미는 한국 여가수 계보에서 빠질 수 없는 신중현 사단의 보물이었다. 또 이들이 낸 앨범 역시 신중현 음악 중에서 손꼽을만한 명곡들을 담고 있다. 김정미는 고3시절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신중현사무실에 갔다가 인연을 맺었고, 김추자는 신중현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가수를 시켜달라고 조른 끝에 음반을 냈다. 김추자는 1970년 패티김이 취입하기로 돼있던 라디오 주제가 ‘님은 먼곳에’를 펑크내는 바람에 가수로 데뷔했고, 김정미는 1971년 소위 소주병 난사사건으로 리사이틀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김추자를 대신하여 처음 무대에 올랐다.
김정미의 앨범 <NOW>와 <바람> 등에 실린 노래 '봄' '바람' '햇님' '어디서 어디까지' 등은 지금들어도 손색이 없는 명곡이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김추자는 상황이 달랐다. 김추자의 음반에 수록된 ‘늦기전에’와 ‘나뭇잎이 떨어져서’‘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은 대중적인 인기를 업고 크게 히트했다. 흑인풍의 퍼머머리에 소위 나팔바지를 입고 다이내믹하게 노래를 부르던 김추자는 시대의 패션트렌드까지 바꾸면서 종횡무진했다. 당시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까지 돌 정도였으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만하다.
'신중현 사단'의 전성시대에 등장한 또 한 명의 가수는 장현(작고)이었다. 매력적인 중저음의 보이스칼라를 가졌던 장현은 신중현의 곡을 받아 '미련' '기다려주오' '석양' 등의 노래를 잇달아 히트시켰다. 최근 인기를 얻었던 세시봉 세대의 가수들과 함께 신중현 사단의 가수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흔들면서 승승장구했다. 신중현의 음악은
신중현은 1973년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 '미인' 등의 히트곡을 내지만 1974년 대마초 파동에 휘말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마초를 피우던 연예인들이 무더기로 구속되거나 자격정지를 당했던 사건이었다. 신중현 역시 수많은 곡들이 방송 금지곡으로 묶였고 5년간 방송 활동도 금지됐다. 신중현과 그의 사단들은 그 사건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장발과 통기타, 청바지 문화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발아기에 대마초 사건은 정치적인 탄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 학살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은 한창 꽃피기 시작한 신중현 음악의 발을 묶고 손을 자르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한국대중음악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
이제 팔순을 넘은 신중현은 그의 아들인 신대철(시나위), 신윤철(서울전자음악단), 신석철 (드러머) 등이 음악적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절반의 성공을 거둔 신중현 음악에 대해 뒤늦게 주목한 건 미국의 팝음악계였다, 2009년에는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인 펜더로부터 아시아 뮤지션으로는 최초, 전세계적으로는 여섯번째로 기타를 헌정받았다. 또 미국 음반사 '라이트 인 디 애틱'이 지난해 신중현의 대표곡을 모은 월드앨범 '아름다운 강산:대한민국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Psychedelic Rock Sound)'를 출시하기도 했다. 한 달여전 신중현과 통화를 했다. 그는 10년을 목표로 마지막 음악작업을 시작하여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했다. 목숨이 붙어있을지 모르지만 죽는날까지 자신의 음악인생의 완성을 위한 작업에 매달리겠다고 말했다. 아,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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