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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최인호세대와 ‘이생망’ 사이

최인호세대와 이생망사이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요즘 유행어 중 하나가 이생망’(이번 생애는 망했어)이란다. 그런데 이 유행어의 근원지가 20대 청년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보이스 비 엠비셔스(Boys be ambitious)’를 외쳐도 모자랄 젊은층들 사이에서 이처럼 자괴적인 말이 유행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일이다. 그 대부분의 책임은 나와 같은 기성세대에 있다는 건 피할 수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위로를 한들 삼포세대인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통할 수 있겠는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빛나는 청춘의 한때를 구가했던, 지금은 고인이 됐거나 장년층에 접어든 그네들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밥 세끼 먹기가 쉽지 않았던 70년대에 불같은 열정으로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한때를 구가했던 선배들의 청년시절 이야기가 절망에 빠져있는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까 싶어서다. 또 그들의 삶을 되짚으면서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작은 힌트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70년대 청년문화를 통기타와 청바지로 정의한 건 문학평론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병익 선생이었다. 그 김병익 기자가 청년문화의 기수로 꼽은 이들 중에 작가 최인호와 영화감독 이장호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가수 이장희는 두 사람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이들은 70년대 <별들의 고향>이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내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청년문화의 기수였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그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추운 자취방에서 글을 쓰거나 노래를 만들면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철저하게 무명의 청년들이었다.

 

 서울고등학교 동창인 세 사람은 최인호와 이장호 감독이 동기동창이었고, 이장희는 2년 후배였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온 이는 최인호였다. 최인호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한 천재소년작가였다. 그당시 중앙일보 문화부에 근무하던 정규웅씨의 증언에 의하면 교복입은 최인호가 걸어들어와 신춘문예 입선했다는 통지를 받고 왔다고 얘기했을 때 누군가의 대리인으로 심부름 온 줄 알고 본인이 직접 오라. 대신 오는 건 안된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그런 천재작가도 빛을 보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최인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처음 소설의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지만 신문사 간부가 조간신문에 재수없게 무덤이라니. 다른 이름으로 고쳐봅시다라고 얘기해서 <별들의 고향>이 됐다.

 차가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된 호스티스 경아의 사랑이야기였다. 신문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출판사 예문관의 대표가 최인호를 호출했다. 그때 함께 간 친구가 바로 이장호였다. 그 자리에서 예문관 대표는 당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출판 계약금을 현금으로 내놓았다. 두 사람은 거금을 앞에 두고 어찌할 줄 모르다가 계약서에 싸인한 뒤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돈을 싸서 나왔다.

 이 책은 날개 돋힌듯이 팔려서 100만 부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 등으로 한층 검열이 강화되어 새마을운동 영화와 전쟁영화,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영화들이 판치던 충무로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은 누구든 군침을 흘릴 만했다. <별들의 고향>은 영화로 만들기에 딱 좋은 대중적인 소재였다.

 

 최인호가 손잡은 사람은 당연히 이장호와 이장희였다. 그들이 함께 만든 <별들의 고향>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 가면서 승승장구햤다.

 “경아, 오랜만에 함께 누워보는군”,“아저씨, 추워요. 안아주세요”,“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등 아직도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회자되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 신성일과 아역배우 출신 안인숙을 주인공으로 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속편과 속속편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천만 영화가 흔한 시대가 됐지만 그당시 개봉관 한 곳에서 기록한 수치가 46만이니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영화였던 셈이다.

 ‘난 그런 거 몰라요 / 아무 것도 몰라요 / 괜히 겁이 나네요 /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난 정말 몰라요 / 들어보긴 했어요 / 가슴이 떨려 오네요 / 그런말 하지 말아요 / 난 지금 어려요 / 열아홉살인 걸요 / 화장도 할 줄 몰라요 / 사랑이란 처음이어요 / 웬일인지 몰라요 / 가까이 오지 말아요 / 떨어져 얘기해요 / 얼굴이 뜨거워져요.’

 ‘쎄시봉의 멤버였던 이장희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한 잔의 추억등을 담은 이 영화의 OST로 영화음악의 새 장을 열었다. 이장희는 1972년 데뷔 이후 통기타 문화의 기수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음악에 대한 인식이 지극히 낮았다. 노래가 히트하면 그 노래를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

 “제가 조감독 시절만 하더라도 영화음악을 만드는데 2시간이면 됐죠. 그런데 `별들의 고향'은 꼬박 한 달 걸렸어요. 한창 잘나가는 가수가 영화음악을 맡은 것도 처음이었죠.”

 이감독의 회상처럼 이장희는 쓸만한 O.S.T를 만들어냈다. 이장희는 <별들의 고향>을 수십차례 읽으면서 가사를 쓰고 악상을 떠올렸다. 그러나 편곡에 능하지 못한 이장희에게 편곡자가 필요했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친구 강근식이 참여했다. 플룻을 전공했던 레코드회사 사장도 뭔가 작품을 만들어보자면서 흥분했다.

 ‘난 열아홉살이예요는 이장희 대신 앳된 소녀가 필요하다는 결론 끝에 가수를 물색했다. 그때 여고를 갓졸업하고 미8군 패키지무대서 노래하던 긴머리 소녀가 나타났다. 나이도 열아홉. 미성의 맑은 목소리로 정말 실감나게 불렀다. 수년 뒤 중저음의 보이스로 열애를 불러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 윤시내가 나는 열아홉살이예요를 불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소설이나 영화의 성공 못지않게 이 앨범도 불티나게 팔렸다. 또 함께 수록됐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한 잔의 추억’‘휘파람을 부세요등 거의 전곡이 히트곡 반열에 올랐다. 소설과 영화, 음반이 동반히트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사랑하던 남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슬픈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결국 낙태를 하는 장면에서 장희가 부른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깔렸죠. 이 장면에서 극장 안은 온통 눈물바다였어요.”

 

 그러나 패기만만했던 청년들은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1976년 이장호 감독과 가수 이장희는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을 금지당하게 된다. 최인호 역시 유신정권과 맞서 싸우던 지식인들로부터 현실성이 결여된 대중작가로 낙인 찍혔다. 또 이보다 앞서 1975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발표로 나는 열아홉’‘나 그대에게 모두는 금지곡이 됐다. 가사가 선정적이고 특히 나는 열아홉살이예요는 미성년자 약취강간을 연상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이후 여러 차례의 해금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아주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있어야 했다.

 여하튼 이장희의 감성과 윤시내의 앳된 목소리가 빚어낸 난 열아홉살이예요는 유신정권의 서슬 아래 퇴폐적 청년문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희생양이 된 셈이다. 또 압제와 싸우던 지식인 사회에서도 민중들의 투쟁의지를 희석시키는 상업적이고 퇴폐적인 노래라는 이유로 외면당한 셈이다. 그러나 첫사랑에 가슴 설레는 여심(女心)을 이처럼 절묘하게 표현해낸 노래가 또 있을까. 70년대. 노래를 듣다보면 산업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차가운 도시에서 자살을 택한 경아의 슬픔이 우리 누이들의 그것처럼 느껴져 가슴을 쓸어내린다. 비록 최인호는 암과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이장호 감독과 가수 이장희는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나고 보면 청춘의 한 때가 빛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나이가 든 이들은 젊은이들의 패기와 열정이 부럽겠지만 당사자들은 늘 힘들고 괴로운 시기가 청춘의 한 시절이다. 지금 미생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준비를 해놓고 끈질기게 기다리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그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다. 최인호와 이장호, 이장히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청춘의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한 차례 시련을 겪고 무너졌지만 다시 보란 듯이 재기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