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이 말하는 '미인' 탄생 비화
검열에 저항한 신중현과 엽전들의 2집앨범 재킷사진. 왼쪽부터 이남이, 신중현, 권용남
“그 당시에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자주 다녔어요. 공연장마다 미인들이 많이 왔죠. 한창 젊을 때니까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미인은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로망이죠. 내가 자꾸 보게 되는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구나 해서 노랫말로 쓰게 됐어요.”
일흔살이 훨씬 넘은 노가수는 청춘의 한때 공연장을 찾아와 눈길을 끌던 미인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냈다. 그렇게 쓰여진 노랫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노랫말이라니. 74년 8월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발표한 첫앨범의 수록곡 ‘미인’은 한국 록의 역사를 바꾼 노래가 됐다.
“록그룹을 하면서 늘 우리네 정서에 녹아있는 한국적인 흥을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어요. ‘각설이타령’을 듣다보면 슬픔 속에서도 풍자를 담아내서 듣는 이들을 사로잡는 여유가 느껴지거든요. 서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흥과 가락을 록 속에 녹여내는 작업 끝에 ‘미인’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졌죠.”
앨범 속에서 신중현은 서양에서 들어온 기타로 5음계만을 써서 경쾌한 기타 리프로 가야금이나 거문고 소리를 냈다. 미8군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야전에서 닦아온 기타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중현과 엽전들이 단숨에 한국 록의 역사를 바꿨지만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애드포, 덩키스, 더맨 등의 밴드를 결성하여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른두살의 젊은 아티스트 신중현에게 가장 큰 불만은 팝을 우대하고 우리 가요를 천시하는 가요계 풍조였다.
“70년대만 해도 ‘엽전들이 뭘 하겠냐?’는 자조적인 표현이 만연했어요. 그래서 ‘내가 엽전이다. 엽전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오기로 그룹 이름을 지었죠. 또 엽전은 곧 돈이고, 그 생김이 참 예술적이잖아요. 서양돈과 달리 엽전은 한국적인 느낌도 강해서 제가 하려는 음악과도 잘 맞았죠.”
그가 영어식 그룹 이름을 버리고 결성한 엽전들에 베이스 이남이와 드럼 김호식을 영입한다. 그리고 지구레코드에 150만원을 받고 1년6개월간 전속가수가 된다. 그러나 신중현이 만든 노래들은 레코드사 대표인 임정수의 고개를 젓게 만든다. 러닝타임이 5분에 가까운 ‘미인’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수록곡들이 너무 길었고, 가요제작자도 소화하기 힘든 리듬과 멜로디를 담고 있었다.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로 비매품 1,000장만 찍었다. 그리고 또하나 중앙정보부의 검열이 신중현을 괴롭혔다.
“그당시엔 내 노래라면 듣지도 않고 금지를 시켰어요. 당시에 중앙정보부의 ‘끄나풀’들이 아무런 절차도 없이 방송금지를 시켰죠. ‘끄나풀’들도 대개 가요계 주변 원로들이었어요. 제가 찾아가서 항의도 해봤지만 소용없더라구요. 신중현은 뭔가 불온한 인물이라는 인식 때문에 미운털이 박힌거예요. 그때 비매품으로 찍었던 앨범은 대부분 폐기처분 됐어요. 레코드사도 갖고 있으면 무슨 일이 날까봐 없애버린거죠.”
이 비매품은 지금 LP시장에서 1백만원을 호가한다. 정식 발매된 1집은 드러머 권용남을 새로 영입한 뒤 러닝타임도 줄이고 내용도 수정해서 내놓은 앨범이다. 이 앨범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팔려나갔다. 노랫말처럼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자꾸만 듣고 싶은 앨범’이 됐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한 번 먹고 두 번 먹고 자꾸만 먹고 싶네’로, 구두닦이는 ‘한 번 닦고 두 번 닦고 자꾸만 닦고 싶네’ 등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까지 등장했다.
지방의 판매업자들이 지구레코드에 몰려와서 찍어내기가 바쁘게 현금을 주고 사갔다. 정확한 기록도 없지만 1백만장이 넘게 팔렸고, 트로트 위주의 가요시장이 록밴드 시장으로 바뀌는 분기점이 됐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경식은 비매품으로 발매한 오리지널버전의 앨범커버의 추천사에서 ‘한국의 로크(Rock) 뮤직은 있었던가? 한국의 로크란 과연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 앨범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삼천만의 히트곡이 된 ‘미인’을 비롯하여 그루브한 진행이 돋보이는 ‘그 누가 있었나봐’와 ‘긴긴밤’, 펑크한 느낌을 담은 ‘생각해’ ‘저 여인’, 7분여의 사이키델릭풍의 곡 ‘떠오르는 태양’ 등 명곡들이 이 앨범에 수록됐다.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과 달리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은 ‘예륜’(藝倫, 예술윤리위원회)은 신중현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또 허름한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구사하는 그들이 혐오감을 주고,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괴롭혔다. 게다가 그 시절은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내려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폭압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신중현은 항복 선언(?)을 한다. 2집 앨범 수록곡이 이유도 없이 음반심의에 걸리자 장발을 자르고 건전한 내용의 노래만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요사에 길이 남은 2집 앨범(75년 10월) 재킷사진이다. 세 명의 멤버가 고궁을 배경으로 단정한 머리에 정장차림으로 도열하여 근엄한 표정으로 45도 위를 바라보는 재킷사진은 항복선언이 아닌 독재정권에 감자를 먹이는 유쾌한 풍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은 75년 12월 가수 김추자, 같은 그룹 멘버 권용남과 함께 대마초가수로 낙인찍혀 구속되고 만다. 청와대로부터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고 국민의식을 고취하는 건전가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거절한 대가였다.
“제가 대마초를 피운 건 60년대말 미8군 시절 한두차례였어요. 제집 근처에 삼밭이 있어서 동료 가수들이 와서 달라면 조금씩 나눠줬죠. 그런데 제가 구속되고 보니 대마초사건의 주범이 돼 있더군요. 결국은 권력자들이 불편해하는 제 노래의 확산을 막겠다는 저의가 담겨 있던 거죠.”
권력자들은 5년여 전 대마초를 피운 사실을 문제삼아 가수 신중현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켰다. 신중현 뿐 아니라 그가 관여해서 만든 김정미, 김추자 등 탁월한 가수들도 함께였다.
만약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바명횡사하지 않았다면 신중현은 그냥 불운한 한 시대의 천재가 되어 박제된 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김추자와 김정미 등 좀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발군의 여가수들이 채 피지도 못한 채 현장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신중현이 감옥으로 가지 않고 좀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지형도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80을 바라보는 이 노장가수는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앞으로 10년을 목표로 인생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 모르는 음악작업을 하고 있다. 그 결과물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신중현이기 때문이다.
추신: 혹시 가수 김정미씨의 근황을 아시는 분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가요계를 떠난 이후 어느 매체에서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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