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영화 <베테랑>이 1,272만명의 관객을 동원, 영화 <암살>을 넘어 올해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역대 6위의 준수한 성적이다.
영화 <베테랑>의 첫 손 꼽는 명대사는 형사 황정민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였다. 그의 아내 역시 검은손이 내미는 명품백과 돈다발을 팽개치고, 황정민에게 와서 “가오 떨어지게 살지말자”고 말한다. 류승완 감독은 영화배우 강수연(부산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이 어떤 행사의 뒷풀이에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야, 마셔”를 외치는 걸 들으면서 머릿속에 각인됐다고 토로했다. 어찌됐든 유승완 감독은 가오를 세우면서 영화 흥행에도 성공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사실 ‘가오’는 일본말이다. 일반적으로 얼굴을 뜻하지만 체면의 뜻으로도 쓰인다. 우리 일상에서는 주로 경상도권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다. 해석하자면 자존심 구기는 일을 하지 말자, 혹은 체면 떨어지는 일은 하지 말고 살자는 뜻이다. 그와 비슷한 속어로는 “존심 상한다”는 말이 자주 쓰인다. “에이. 존심 상하게 왜 이래” 정도. 요즘 젊은층들은 ‘가오’보다는 ‘존심’을 더 애용하는 듯하다.
그런데 현실 속의 ‘가오’는 영화속 ‘가오’와는 사뭇 다르다. 영화 속에서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존심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협하는 일은 하지말자’고 외치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을 해서 다른 사람한테 약점을 잡히지 말자’는 말로 쓰이고 있다.
영화 속 유아인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라고 비아냥 거리듯 이땅의 서민들이 전자의 가오를 지키는 건 쉽지 않다. 누군가 타협의 대가로 명품백에 오만원짜리 돈다발을 가득 들고 온다면 감당할 수 있는 서민들이 얼마나 될까? 매달 쥐꼬리만한 남편 월급으로 집세 내고, 학원비 내고, 쌀 사고, 은행빚 갚고 난 뒤 마이너스 통장을 쥐고 사는 이 땅의 아내들이 돈다발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을까? 그런 제안도 들어오지 않지만 그런 제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까 고민조차 안해본 천만 관객들은 그냥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뿐이다. 가오를 세우기 위해서 과감하게 내부자 고발을 감행하는 공무원들이나 대기업의 구성원, 사학재단 등의 선생들의 험난한 길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보아왔다. 정치인들의 비리를 폭로한 정치권의 내부 고발자들 역시 한결같이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 언론이 그를 용기있는 시민으로 추켜세우지만 이내 잠잠해지면 어김없이 갑의 공격이 시작된다. 어떤 구실을 동원하여 그가 있던 조직에서 쫓겨나고 나아가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경찰과 검찰에 끌려다니면서 원치 않는 소송에 휘말려야 한다. 그쯤 되면 그가 간절히 원했던 ‘가오’나 ‘존심’은 영화에서처럼 승리의 도구로 쓰이지 않는다.
소시민들은 매일매일 ‘가오’ 떨어지는 일을 경험하면서 절망한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성공한 인생들은 젊은 나이에 대기업 이사 자리를 꿰차고 수십억 연봉을 받는다. 그들의 자식들은 소위 아이비리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무슨 빽인지 군대도 가지 않는다. 직업과 재산을 대물림하는 그들은 미국 유수의 기업에 취업하거나, 로스쿨에 들어가서 일찌감치 갑의 위치를 확보한다. 그에 비해서 대부분 소시민들의 자녀들은 개천에서 용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 유학은 고사하고 개인과외는 꿈도 못꾼다. 일찌감치 8학군에 이사가지 못해서 소위 스카이대학에 한 명도 못가는 변두리 고등학교에 다닌다. 어찌어찌 한두 과목 찍어서 학원에 보내도 좀체로 학업성적은 오르지 않는다. 비정규직이나 일용직 근로로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의 자녀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집안의 생계에 보탬이 돼야 한다. 실제로 서울의 고등학교 중에는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등교한 학생들이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도록 배려(?)한 룸을 운영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소시민들에게 가오 떨어지는 일을 하지 말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베테랑>이 일천만 관객에게 전한 가오에 담긴 메시지는 다소 불편하다. 현실 세상에서 절대로 가오 떨어질 일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가진 자들에게 ‘가오 떨어지는 일을 하지 마라’고 강조해야 한다. 매일매일 가오 떨어지는 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유명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한 편으로 이땅의 소시민들에게는 가오를 강요하면 안된다. 가오 때문에 결혼식장이나 상가집 앞에서 삼만원을 넣을까, 오만원을 넣을까 고민한다. 조그만 경차를 타도 되는데 어딜가면 따갑게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중형차를 탄다. 후배들 앞에서 술값과 밥값을 시원하게 쏘고 카드빚에 시달린다. 무리해서 자녀 결혼식을 치루고 나니 먹고 살게 없다. 친구들 모임에 가서 가오 죽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몇몇 모임을 줄이고 싶어도 세상과 멀어지는 것 같아서 쉽지 않다. 내가 왕년에를 외쳐도 이제 가오가 살지 않는다. 이쯤 되면 가오를 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은 결코 가오와는 아무 상관없는 삶의 허위일 뿐이다.
영화 <베테랑>이나 드라마 <어셈블리>를 보면서 허탈함을 느끼는 건 그런거다. 영화나 드라마는 절대 다큐가 될 수 없다는 거다. 우리에게는 진솔한 다큐가 필요한 때다. 천만 영화보다 십만 다큐가 많아져야 한다. 우리의 의식을 개조하지 않으면 당신의 삶도 나의 삶도 가오 잡다가 망친다. 하루를 살아도 실속있게 살자. 다만 가오잡고 사는 인간들에게 가오 떨어지는 일 좀 하지 말라고 강하게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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