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여친용갱’
조영남 작 <여친용갱>
조영남은 가수들 중에서도 인문학적 스팩트럼이 넓은 사람이다. 그의 청담동 집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건 책이다. 또 한 편에는 그가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본업이 가수라는 걸 지운다면 마치 인문학을 전공한 대학교수의 서재를 방불케한다. 그의 서재를 채우고 있는 수천권의 책을 일별해보면 주로 인문학 서적이 주류를 이루지만 어느 특정분야에 한정돼 있지 않다. 그가 단순히 장식용으로 그 책을 쌓아놓은 게 아니라는 건 이미 그가 쓴 많은 책들로 증명되었다. 예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책부터 그림에 대한 에세이, 시인 이상의 시를 분석한 책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저술가들의 그것을 뛰어넘는 책들을 펴냈고 그때마다 세상의 반향을 이끌어냈다.
대개의 사람들은 조영남을 노래 잘 부르는 가수, 그림도 그리는 가수 때로는 성에 대해서 자유분방한 연예인, 오락프로그램에서 주책을 떠는 가수 정도로 알고 있다. 이 글의 제목 ‘여친용갱’은 그가 그린 콜라쥬 형식의 그림으로 평소 교유하던 여성들의 사진을 따붙여 마치 중국 시안의 병마용갱과 혼용하여 만든 그림의 제목이다. 언젠가는 조영남의 여성편력(?)에 대해서 분석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마침 ‘여친용갱’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정초에 가족들과 더불어 서울 청담동 조영남 형 집에 갔었다. 그는 연말부터 슬금슬금 몸살기운이 있어서 모든 약속을 작파하고 집에 쉬고 있는 중이었다. 10여년을 만나온 그에게서 몸이 아파 쉬고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웬일인가 싶었다.
아직 청소년기에 있던 우리 아이들은 마지못해 따라온 눈치였다. 아이돌 스타도, 그렇다고 잘생긴 영화배우도 아닌 웬 가수 할아버지(?) 집에 가느냐는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그 넓은 집에 도착했을때 조영남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것도 거실에서 말이다.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서커스단 단원처럼 좁은 거실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으니 아이들에겐 신기한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와, 집에서 자전거를 탈수도 있네.”
그렇다. 조영남은 집에서 자전거를 탈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의 빌라 거실이 다른 집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넓은 집이기도 했지만, 좀 작았다 하더라도 그는 자전거를 탔을 것이다. 그를 만난 이후 늘 겪어온 일이지만 보통사람의 그것과 다른 기행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TV 토크쇼에 나와서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다가 시청자들한테 씹혔고, TV 가요프로그램에 바퀴달린 신발을 신고 주르륵 미끄러져 입장하는게 조영남이다. 매맞을 각오로 일본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친일파로 몰리는가 하면, 전시장에서 자신의 가상장례식을 치룬 사람이기도 하다. 나에게 코로 소주마시는 법을 전수하기도 했다(그런데 이건 절대 따라해선 안된다).
여하튼 그의 발언과 행동은 보통 그가 즐겨쓰는 ‘딴따라’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늘 거침없는 발언 때문에 안티팬들이 쌓이기도 했고, 전방위에 걸친 예술행위-글쓰기, 그림그리기 등등-로 멀티 엔터테이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날, 몸살이 난 이유를 얘기하면서 그는 마무리에 들어간 시인 이상의 시해설서의 교정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속으로 ‘너무 난해해서 문학평론가들도 꺼리는 이상을 잡고 씨름했으니 병이 안날리 없지’라면서 원고를 읽어내려갔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자세를 고쳐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이상의 시와 소설을 이처럼 독특하면서도 면밀하게 관찰하고 해석한 책이 어디 있었던가? 이 책은 결국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한길사)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빛을 봤다. 그는 책 출간을 기념한 북콘서트에서 이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상 시에 대해서 열등의식은 느꼈지만 상처가 되기보다는 매료되었습니다. 이상 시에 ‘뭔가 있다’라는 걸 일찍부터 알게된 거죠. 이상과 조영남은 DNA가 같은 것 같았다고 봅니다. 이상은 건축을 공부한 수재이죠. 우리 아버지, 큰아버지도 모두 목수였어요. 내 피에도 이상처럼 건축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상이 노래를 기가 막히게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 가지 코드가 맞는 셈이죠. 무엇보다 많은 비평서가 있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를 중심으로 풀어낸 책은 없었어요. 나는 광대니까. 광대의 방식으로 썼습니다.”
여하튼 정초에 그는 “십수년만에 지독한 몸살이 왔다는 건 한 번쯤 점검해봐야 할 사건”이라는 내 충고를 받아들여 아는 후배의사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난생 처음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을 겪어야 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 일 날뻔했다.
청담동 집 그의 서재에서.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죽다 살아난 사건 이후 조영남의 삶에 대한 태도는 다소 변화를 맞는다. 사내들과 술을 마시기 보다는 여친들과의 교유에 집중하고 있다. 여친들과 영화보러 다니고, 그림 전시회에 가고, 집근처 커피숍에 앉아 이바구 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보낸다. 각설하고 나는 그의 여친들의 성향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싶다. 한 편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똑 부러진 전문직 여성들이다. 또 한 편에는 특별히 사줄만한 구석은 없지만 애교 넘치고 크게 세상 고민 안하고, 사는 데 별로 걱정이 없는 젊은 여성들이다. 전자는 특별하게 두드러진 미모는 아니고, 후자는 대부분 미모를 갖춘 여성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조영남의 공식적인 첫여자는 누구나 알다시피 배우 윤여정이다. 세간에 알려진 사실은 윤여정과의 이혼의 발단은 조영남이 두 번째로 결혼한 백모 양과의 외도 때문이었다. 몇 년 전 나는 그들의 이혼에 얽힌 새로운 사실을 들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두식 화백(전 홍대미대 학장)이 몇 년전 여행길에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사실 조영남이 백모양 문제로 집에서 쫓겨나왔을 때 여정이가 나를 찾아왔었어. 주변에서 모두가 이혼하라고 하는데 정작 당신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 그때 내가 두 사람의 이혼을 말렸어야 했는데….”
‘쎄시봉’ 시절부터 절친으로 지내온 이두식 선생이 왜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중재를 하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십수년이 지난 뒤에 회한처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여하튼 이후 조영남 스스로 여친으로 부르던 여성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화가 김점선,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장영희, 작가 겸 번역가 이윤기, 방송인 최윤희 등은 그의 친구이자 여친 명단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두식 화백을 비롯하여 앞에 언급된 분드링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꺼번에 그의 곁을 떠났다. 내가 보기엔 이분들은 조영남과 예술적 DNA가 같아서 친구가 된 사람들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이들은 조영남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떤 역할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분명하다. 그들은 광대 조영남을 이해하고 좋아했으며, 조영남 역시 그들을 보낼 때마다 가장 안타깝고 비통해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난소암으로 세상을 뜬 화가 김점선은 자유분방하며서도 소탈한 성격, 결코 시류에 흔들림없는 화풍을 견지하면서 씩씩하게 한 세상 살다갔다. 거침없으면서도 유쾌한 붉은말 그림은 트레이드 마크처럼 화가 김점선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그를 꾀짜 화가라고 칭했지만 사실은 주관이 뚜렷했던 화가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두 사람이 알게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화투’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화투판에서 만났다는 얘기가 아니다. 2003년 우연하게도 화투를 소재로 그리는 두 사람을 초대하여 한 갤러리에서 기획전을 마련한 것이다. 조영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다시피 20여년 전부터 줄기차게 화투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왔다. 김점선 역시 오십견 때문에 작업이 힘들어지자 컴퓨터를 배워서 화투그림을 그렸다. 그런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이었지만 그림이라는 동류항 말고도 너무나 비슷한 서로의 성향을 발견하고는 금세 가까워졌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영남이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여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화가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가수가 그림은 무슨? 뭐 그런 심정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김점선은 달랐다. 자신이 유명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가수와의 공동전시회를 흔쾌히 수락했다. 친구가 된 이후에도 조영남의 그림을 화단에 알리는데 발벗고 나섰다. 미술계의 아웃사이더인 조영남을 스스로 미술계의 이단아를 자처한 김점선이 품은 셈이다.
신화학자이자, 소설가, 번역가인 고 이윤기와의 인연 또한 절묘하다. 조영남과 이윤기가 대면한 건 조영남과 친분이 있는 종교학자 오강남의 주선 덕분이었다. 2001년 어느날 오씨가 조씨를 동반하고 경기도 양평의 이윤기의 집을 찾았다. 이날 모인 세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신학전문가였고, 신은 사랑하되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한 시간여 동안 삶은 밤을 까먹으면서 얘기하다가 이씨가 조씨에게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얘기하면서 우정이 시작됐다. 실제 이윤기는 조영남보다 두 살 어리다. 그러나 외양으로는 이윤기의 흰머리 때문에 형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영남이 아이디어를 냈다. 사석에서는 이윤기가 조영남을 형으로 부르고, 남 앞에서는 조영남이 이윤기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것이다.
유방암과 척추암 등 온몸을 덮친 암세포와 싸우다가 작고한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도 조영남이 아끼던 여친이자 예술적 동지였다. 두 사람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장교수이 부친이 유명한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였던 장왕록 선생이라는 것부터 밝혀야 한다. 조영남이 자신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쳤던 책 중의 하나로 꼽는 <그리스 로마신화> 등을 번역한 분이다.
두 사람이 만난 건 조영남이 TV토크쇼 사회를 맡고 있던 시절 장교수가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평소 장교수의 글을 좋아했던 조영남이 장교수를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모신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조영남은 장왕록 교수 10주기 출판 기념회에서 노래를 불렀고, 장교수가 조영남의 환갑잔치를 열어줬다. 또 조영남은 행복전도사 최윤희와도 오랜 인연을 이어왔으나 안타깝게도 먼저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 조영남은 정년퇴직을 맞은 경향신문 유인경 기자-현재 조영남의 여친 중 가장 나이가 많은-를 위해 성대한 정년퇴임 기념식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밖에도 개그우먼 이성미와 이경실 등도 조영남을 오빠처럼 따르면서 평생을 만나왔으며, 오랫동안 함께 라디오를 진행해온 최유라도 그의 여친 명단에 있다.
조영남에게 여친 리스트만 있는 게 아니다. 대한성공회 김성수 대주교, 김한길 통합민주당 의원은 물론 손학규, 정대철, 정동영 전 의원에 이르기까지 그와 교유하는 인사들이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소설가 김홍신도 자주 만나는 사이다.
그러나 조영남의 여친용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요즘엔 그 연령대가 20대로까지 확산되는 듯하여 살짝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많은 여성들과의 교제(?)로 인해 분란을 만든 적이 없다. 그가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과정은 있었지만 만천하에 여자친구라고 공표한 그녀들로부터 공격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혹은 그녀들의 남편들로부터 단 한 번의 타박을 들은 적이 없다. 이쯤해서 ‘많은 여자친구들과 즐겁게 인생을 사는 법’에 대한 책 한 권 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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