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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08건

  1. 2018.05.02 서울의 봄, 조용필 창밖의 여자
  2. 2017.10.25 천상천하 나훈아
  3. 2017.08.28 <나는 자연인이다>가 중년을 사로잡는 이유?
  4. 2017.06.21 다시 활판이 그립다
  5. 2017.06.20 그녀가 떠났다
  6. 2017.01.05 결혼식 축시의 어떤 예
  7. 2016.09.20 가을은 늙지 않는다
  8. 2016.09.12 호박
  9. 2016.06.24 '딴따라'의 왕따, 우리의 이중성 (9)
  10. 2016.05.31 홍만표와 조들호, 현실과 판타지 사이
  11. 2016.05.31 안성기, 배우로서의 시간 59년째
  12. 2016.05.16 김완선, "이장희 선배가 내 인생의 멘토죠."
  13. 2016.04.25 한화고, 김성근 감독
  14. 2016.03.30 김수현과 김은숙, 이순재와 송중기 사이
  15. 2016.03.23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16. 2016.03.11 말입니다. 너무 거슬리지 말입니다 (1)
  17. 2016.03.04 추자, 미조, 인희. 그녀들의 귀환 (1)
  18. 2016.02.22 신중현이 말하는 '미인' 탄생 비화 (1)
  19. 2016.02.15 결국 ‘마돈나’를 못보고 말았다
  20. 2016.02.12 창고에서 잠자는 영화를 만든 까닭은?
  21. 2016.01.13 일어나라, 조덕배 (1)
  22. 2016.01.07 김광석과의 마지막 인터뷰 (1)
  23. 2016.01.05 최인호세대와 ‘이생망’ 사이 (1)
  24. 2015.12.28 스토리가 사라진 드라마들
  25. 2015.12.28 금수저? 어이없다고 전해라
  26. 2015.12.23 잔인한 추억공화국
  27. 2015.12.16 조영남의 ‘여친용갱’
  28. 2015.12.14 다시 겨울공화국에서
  29. 2015.12.11 그만하라고 전해라
  30. 2015.12.10 신중현의 탁월한 여가수들

 

 

 

 

 

 

 

 

 

 

노래의 탄생 / 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년 서울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던 땅이었다. 박정희의 퇴장으로 서울의 봄이 오는가 했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 암울한 시간이 찾아왔다. 올해로 노래 인생 50주년을 맞은 조용필에게 1980년은 격동의 역사 만큼이나 극적인 한 해였다. 8군 시절 대기실에서 피웠던 대마초가 문제가 되어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히트로 긴 무명의 터널에서 벗어나온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남산에 끌려가 뭇매를 맞던 기억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조용필은 좌절하지 않고 전국 명찰을 다니면서 판소리를 공부하면서 목소리를 단련했다.

 1979년말 대마초 가수의 해금 조치와 동시에 동아방송 안평선 PD가 연락해 왔다. 곧 시작할 라디오극 <창밖의 여자>의 주제가를 만들고 불러달라는 요청이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 나를 잠들게 하라.’ 드라마 작가인 배명숙 씨가 건네준 노랫말은 조용필의 가슴을 뛰개 했다. 꼬박 닷새 동안 한 끼도 먹지 않은 채 작곡에 전념했다. 설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머릿속에 맴 돌던 악상이 술술 풀려나왔다. 악보를 들고 동아방송 녹음실로 뛰어갔다. 녹음실 밖에 있던 안 PD와 배 작가가 노래를 들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피를 토하듯 이어지는 한 섞인 노래는 듣는 이를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구레코드는 창밖의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하는 앨범을 세상에 내놨다. ‘단발머리’, ‘한오백년’,‘고추잠자리’, ‘미워 미워 미워등 버릴 곡 하나 없는 명반이 탄생했다. 단일 앨범으로 1백만장 이상이 팔려 나간 최초의 앨범이기도 했다. 그 해 조용필은 TBC(언론 통폐합으로 KBS가 됨)가 주는 최고 인기가수상을 받았고, 서울국제가요제에 나가 창밖의 여자로 금상을 받았다. ‘가왕의 서막이었다.

 5·18 광주항쟁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암울한 시기에 한맺힌 외침을 담은 조용필의 노래가 대중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것이다. 조용필 역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유독 많았다고 회고한다. 조용필에게 와신상담의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태어날 수 없는 노래가 바로 창밖의 여자.

 

 

Posted by 오광수

 

 

 

 

천상천하 나훈아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11년 만에 펼쳐지는 나훈아 콘서트가 코 앞이다. 여기저기서 티켓 구할 수 없냐는 문의가 쇄도하지만 순식간에 매진된 티켓이 남아있을 리 없다. 오래 전 일이지만 나훈아와는 여러 차례 만나 인터뷰도 하고, 공연도 보러가면서 친분을 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세상의 관계가 그렇듯이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나던 시절의 일이지 그 이후엔 소원해 졌다. 게다가 나훈아의 잠적이 강산이 변하는 시간만큼 흘렀으니 나 역시 나훈아의 무대와 근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또 나훈아를 둘러싼 세간의 호기심 때문에 생긴 여러 가지 루머에 대해 한 번쯤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적어도 내가 아는 나훈아는 기자한테 구차한 변명을 하거나 대답을 회피하면서 있는 사실을 숨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만나고 싶다. 갑자기 천상천하 나훈아를 꺼내 든 것은 대한민국 가수로서 그가 얼마나 큰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진 사람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때도 나훈아를 직접 인터뷰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긴 연예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방송3사의 예능국장이나 간부들도 명절 때면 나훈아를 알현(?)하여 특집 쇼를 따내기 위해 사무실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곤 했으니 단독인터뷰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하여 지금은 문을 담은 남산밑 아라기획 사무실에서 나훈아와 마주 않았다. 그 당시 아라기획 사무실 사람들은 그를 최 회장(본명 최홍기)으로 불렀다.

 당시 50대 후반의 나훈아는 중년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수컷이 부러울 정도로 충분히 매력이 있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듯 한 까무잡잡합 피부에 잘 차려입은 슈트가 너무나 잘 어울렸고, 말 할 때마다 넘쳐흐르는 자신감은 인터뷰어도 주눅 들게 할 정도였다. 청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노래하면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수긍이 갈 것이다. 그날 어쩐 일인지 나훈아는 미디어와 대중음악 종사자들한테 작심한 듯 불만을 토로했다.

 “오 기자. 마이클 잭슨을 팝의 황제라고 부르지 않소? 그렇다면 나도 세계적인 가수요. 마이클 잭슨이 트로트를 나보다 잘 불러요? 전 세계를 통틀어 트로트를 나보다 잘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나보고 세계적인 가수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리고 나는 뽕짝 가수나 트로트 가수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마치 같은 가수인데 한 길 아래로 깔보는 느낌이란 말이요. 기자나 평론가들이 뭐하는 거요? 우리 같이 노래하는 사람들이 자긍심을 가질 만한 멋진 이름을 지어 줘야지.”

 인터뷰가 끝나고 여담처럼 시작됐다가 나온 얘기지만 내 기억으로는 인터뷰 기사에 반영하여 그의 주장을 녹여낸 기억이 있다. 사실 마이클 잭슨이 팝의 황제이고, 나는 트로트의 황제이니 나와 마이클 잭슨은 동급이다, 또 트로트는 마이클 잭슨보다 내가 더 잘 부르니 나는 세계적인 가수다. 논리를 비약한 그의 주장이었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도 나훈아의 주장이 아니던가.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천상천하 나훈아’로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훈아의 매니저로부터 연락이 왔다. 최 회장께서 경향신문에 칼럼을 쓰고 싶다는 거였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나훈아가 칼럼을 싣고 싶다는 데 마다할 리 없었다.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 보니 그때 보내왔던 나훈아의 칼럼의 원천소스가 있었다. 바로 다음 글이다.

 

 

'아리랑 가수라 불러 주십시오. ' 아리랑 소리꾼이면 더 좋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나훈아입니다. 저는 우리 전통 가요를 아리랑이라 정하고 싶다는 생각의 결론을 얻었기에 펜을 들었습니다. 우선 이렇게 글로 대신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 혼자서 이렇다하고 결론을 내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나서서 불을 지펴야 된다는 생각에, 긴 세월 전통 가요를 불러온 대중 가수의 한 사람으로서, ‘뽕짝이라든지 트로트라는 호칭은 하루 빨리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걸 통감하면서도 어쩌면 누군가가, 아니면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국어 학자나 교수님들이 계시기에 행여 좋은 전통 가요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 주시지 않을까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분들은 전통 가요의 이름을 짓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누군가 하겠지....’하는 막연함에 기대어 기다리기에는 너무, ‘뽕짝이나 트로트라는 이름은 말도 되지 않는 호칭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바뀌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저를 포함한 대중가요의 관계자,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며 희망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즉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중음악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 이름은 그야말로 순수한 우리말이어야 하기에 더욱 더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리랑'이라 정하면 좋겠다는 결론을 얻는 데는 많은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럼 왜 아리랑이 좋은지! '아리랑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저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요컨대, 우리 전통 가요의 중심에서, 또는 앞장 서 계신 여러 임들께서 혹 저의 의견에 대해 이해와 뜻을 같이 하신다면, '아리랑이라 호칭하기 운동에 힘을 모아 주시어 다음 세대가 아닌 우리 세대, 즉 전통 가요를 부르는 지금의 우리 후배 가수들부터라도 ‘'아리랑 가수’, '아리랑 소리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면 이 또한 우리 모두의 큰 기쁨이 아닐련지요.

 

잘 아시겠지만.....우리 전통 가요가 뽕짝이나 트로트라 불리면 안 되는 이유,

 

1. 뽕짝이라 함은 그냥 2/4박자의 리듬을 나타내는 소리이지 뜻을 가진 말이 아니며, 소리의 어감이 전통 가요를 비하하는 듯한 뜻이 담겨져 있고, 또한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음악의 호칭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트로트는 어원이 영어 ‘Trot’에서 비롯된 말이며 이것 역시 음악의 2/4박자의 리듬의 뜻을 나타내며 더구나 외국어이기에 우리나라 음악을 대표하는 호칭으로 불리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전통 가요는 모든 리듬이 폭 넓게 사용되고 있기에 2/4박자를 지정하는 뽕짝이나 트로트의 한정된 리듬이 이름으로 호칭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4. 어느 나라든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전통 가요가 있기 마련입니다.

) 미 국 - (Pop) . 프랑스 - 샹송 (Chanson)

이탈리아 - 칸소네(Canzone), 일 본 - 엔카 (演歌) 등등

만약 외국인이 당신 나라의 전통가요를 무엇이라 합니까?“ 라고 물어 왔을 때, ”뽕짝이오라 하겠습니까? 아니면 영어로 트로트입니다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적절하고 그리고 자신 있게 대답할 말이 없다면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지요.

 

 

그럼 왜 '아리랑'이 좋다고 생각했는가!

 

1. '아리랑'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답은 노래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랑'이라는 말 이 들어간 제목의 이름으로 6000여곡 이상의 노래가 있다고 하니까요.

 

2. '아리랑'의 뜻은 무엇일까요? 답은 모릅니다입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신지요?

아리랑 대해 이런 저런 자료를 수집해 보면,

 

) '아리랑'은 일제에 항거 노래이기도 했고,

 

) '아리랑'은 독제 시대 운동권의 노래이기도 했고,

 

) '아리랑'88 올림픽 때에는 공식 음악으로 지정되어 개회식과 폐막식에 '아리랑'

이 세계의 지구촌 곳곳의 안방까지 전파를 통해 울려 퍼졌던 노래였습니다.

심지어는 1989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서 남북 단일팀의 단가로 채택되어 남과 북이

함께 불렀던 노래이기도 했지요.

물론 옛날옛날 그 옛날부터 농부들, 어부들 우리의 서민들의 노래였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 통일 후를 생각하여도, 삼팔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아리랑'은 꿋꿋하게도 남과 북에서 뜻을 같이하는, 그야말로 우리 민족 음악의 대명사이기도 하지요.

 

) '아리랑'은 그야말로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 '아리랑'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의 결론은 하나같이 그럴 것이다라는 피상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건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다만 확실한 것은, ‘아리랑은 그 옛 날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아리랑'은 그 쓰임새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어느 교수의 '아리랑'연구 자료에서 말했듯이 아리랑은,

슬플 때 만지면 슬픔이 되고, 기쁠 때 만지면 기쁨이 된다.”

그야말로 우리의 일이며 기쁨이요, 한이요, 우리말 중에서도 정말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아리랑'은 낱말의 뜻을 나타내기보다는 음악적으로 리듬을 이루고 흥을 돋우는 무의미한 사설에 가깝다고도 말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아리랑'에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해서 낱말로 쓰면 어떨련지요. 대개 '아리랑'은 단어의 뒤에 붙을 때 앞의 뜻과 말을 도와주며 강조해 주는 역할을 하지요.

여기서 '아리랑'이 단어의 앞에 붙을 때와 뒤에 붙을 때 역할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은 생략 하겠습니다.

 

) 진도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등....

 

그래서 저는 '아리랑단어 앞에 붙여서 뒤의 낱말이 가수나 소리꾼등 음악에 관련된 단어가 붙을 때는 전통가요’, ‘한국가요’, ‘성인가요라는 뜻으로 쓰자는 것이지요.

 

) ‘뽕짝 가수혹은 트로트 가수> '아리랑 가수', '아리랑 소리꾼

KBS ‘가요무대> '아리랑무대

전국 노래자랑> ‘전국 아리랑 노래 자랑

가요 퍼레이드>'아리랑 퍼레이드

트로트 뉴스> '아리랑 뉴스등등.....

 

이런 식으로 '아리랑'을 앞에 두어 전통 가요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외국인이 당신 나라 전통 가요는 무엇이오?”라 물으면 우리는 아리랑이 있지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말이지만 슬플 때 만지면 슬픔이 되고 기쁠 때 만지면 기쁨이 되는 것이 '아리랑'이라면, 우리 가슴에 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흥얼거리며 불러왔던 우리의 전통 가요의 이름을 '아리랑'이라 정한다면 잘 어울어지겠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사실, 더 논리 정연해야 되며 더 세밀하여야 한다는 점은 잘 압니다. 이 몇 장의 글로써는 이해를 돕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되오나 전통 가요를 불러 왔던 저로서 충정과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이라 할까요. 아무튼 이 결론을 얻는데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언제 소주 한 잔에 아리랑 얘기할 날을 기대하며 끝까지 읽어주신 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시고 하시는 일에 축복이 있으시길 빌며 이만 줄입니다.

 

 

아리랑 소리꾼 나훈아 드림

(아리랑 가수)

 

 그런데 문제는 한정된 지면에 이렇게 긴 글을 싣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요즘처럼 온라인이 있어 전문을 실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다. 하여 몇 차례의 논의 끝에 오피니언면 칼럼 분량으로 대폭 축소하여 게재할 수 있었다.

 

 

 

'뽕짝가수'가 아닙니다

- “‘아리랑 가수라 불러 달라. ‘아리랑 소리꾼이면 더 좋다.”

 

 

긴 세월 전통가요를 불러온 가수의 한 사람으로서, ‘뽕짝이나 트로트라는 호칭은 하루 빨리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걸 통감하고 있다. 훌륭한 국어학자가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주면 좋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분들은 전통가요의 이름을 짓는 데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중음악의 이름을 짓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 이름이 순수한 우리말이어야 하기에 더욱 어렵다. 뽕짝이나 트로트가 아닌 아리랑으로 부르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다.

우리 전통가요를 뽕짝이나 트로트로 칭하면 안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뽕짝이라는 것은 4분의 2 박자 리듬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떤 다른 뜻을 가진 말이 아니다. 또 그 어감도 전통가요를 깔보는 느낌이 강하다. ‘트로트의 어원인 영어 ‘Trot’도 역시 4분의 2 박자를 뜻한다. 더구나 외국어이기 때문에 우리 음악을 대표하는 호칭으로 사용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전통가요는 4분의 2 박자는 물론 모든 리듬을 폭 넓게 사용한다. 결국 특정 박자를 지칭하는 뽕짝이나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렇다면 어떤 말이 좋을까.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전통가요가 있다. 미국의 팝,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 일본의 엔카 등이 그것이다. 만약 외국인이 당신 나라의 전통가요를 무엇이라고 부릅니까라고 물을 때 뽕짝입니다” “트로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전통가요를 지칭하는 단어로는 아리랑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아리랑인가. 일단 아리랑이라고 하면 우리 모두 자연스럽게 노래를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노래가 자그마치 6,000여곡이나 된다.

그렇다면 아리랑의 뜻은 무엇인가.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정확한 뜻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어느 학자는 뜻을 가진 단어라기보다는 음악적으로 리듬을 이루고 흥을 돋우는 무의미한 사설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이같은 해석을 떠나 아리랑의 쓰임새를 보면 그 뜻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아리랑은 일제에 항거하는 노래였다. 독재 시대엔 운동권의 노래였다. 88올림픽 때 공식음악으로 지정돼 지구촌 곳곳의 안방까지 전파를 통해 울려 퍼졌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도 남북 단일팀의 단가로 채택돼 남과 북이 함께 불렀다.

옛적부터 농부나 어부할 것 없이 우리 서민들의 노래였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통일 후를 생각해도 우리의 아리랑은 남과 북에서 뜻을 같이하는, 그야말로 우리 민족노래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아리랑슬플 때 만지면 슬픔이 되고, 기쁠 때 만지면 기쁨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우리의 얼이며 기쁨인 동시에 한()이다. 우리말 중에서도 가장 멋진 말이다. 우리가 이런 아리랑에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면 어떨까. ‘아리랑을 가수나 소리꾼 등 음악과 관련된 단어의 앞에 붙여 전통가요, 한국가요, 성인가요의 뜻으로 쓰자는 것이다. ‘뽕짝 가수’ ‘트로트 가수아리랑 가수’ ‘아리랑 소리꾼으로, ‘가요무대아리랑 무대, ‘전국 노래자랑전국 아리랑 노래자랑으로 부르자.

그러면 어느 외국인이 물었을 때 우리의 전통가요는 아리랑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흥얼거리며 부른 우리 전통가요의 이름을 아리랑이라고 칭한다면 얼마나 잘 어울리겠는가.

주장이 그리 논리정연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평생을 전통가요를 노래한 충정과 사명감, 책임감에서 어렵게 내린 결론이다. 앞으로 나훈아와 뜻을 같이하셔서 아리랑이라 호칭하기 운동에 힘을 모아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소주 한 잔에 아리랑 얘기를 할 날을 기대하며.

 

나훈아(아리랑 소리꾼)

 

 200412월경 이 칼럼이 신문에 게재되자 여기저기서 문의가 쇄도했다. 나훈아가 직접 쓴 글이 맞느냐? 왜 갑자기 나훈아 칼럼을 게재한 것이냐? 앞으로 나훈아가 경향신문 고정필진으로 활동하는 거냐? 등등. 그러나 정작 트로트나 뽕짝이라는 말 대신 뭔가 다른 말로 우리 전통가요를 부를 수 있도록 하자는 나훈아의 주장은 그의 주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이후 나훈아의 잠적에는 모처럼 세상을 향해 마음먹고 제안을 했는데 본격적인 논의조차 없었던 이 사건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도 해봤다.

 각설하고, 10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천상천하 나훈아가 우리 앞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가요계는 한류가수라는 신조어가 어색하지 않고, 노래는 몰라도 스타는 살아남으며, 아이돌그룹이나 힙합가수가 대세가 된 세상으로 변했다. 음반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음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아이돌그룹의 공연티켓 구하기 전쟁이 코리안 시리즈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나훈아가 그토록 바라는 뽕짝가수혹은 트로트가수라는 이름 대신 뭔가 새롭고 발전적인 이름 만들기 운동이라도 펼쳐야 하지 않을까?

 다시 노래를 위해 무대로 돌아온 나훈아를 위한 우리들의 화답이 필요할 때다.

 

 

Posted by 오광수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나는 자연인이다>가 중년을 사로잡는 이유?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 절 마당을 쓴다 /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 산에 걸린 달도 / 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 /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 이성선, 백담사.

 

산촌의 밤은 일찍 온다. 여름철은 그대도 좀 낫지만 겨울에는 오후 네 시만 돼도 어둑어둑 해진다. 깊은 산중은 산그림자가 깊어서 더욱더 빨리 밤이 찾아온다. 그래서 산촌은 양지보다는 음지, 낮보다는 밤이 친숙하다. 어쩌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밝고, 시끄러운 것과는 정 반대로 어둡고, 조용한 것들과 더 친하다. 그래서 산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리네 삶과는 거리가 있는 빛바랜 사진 속의 풍경을 갖고 있다. 노란 감나무 아래 피어오르는 굴뚝연기가 정겨운 굴피집, 비탈진 산기슭을 뒤덮은 푸른 배추밭,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계곡 물소리, 그리고 눈만 들면 이마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의 별들까지.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산촌은 다소 비현실적이다. 이성선의 시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 비현실성 때문이리라. 절마당 앞에 펼쳐진 큰 산과 작은 산이 어우러진 풍경과, 밤하늘에 걸리는 푸른 별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동화 속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당대의 산촌은 우리에게 버려진 공간이다. 농촌과 어촌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산촌이라는 단어에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입증이 된다. 농림축산식품부 등에서 농촌과 어촌을 활성화하는 정책은 쏟아지지만 정작 산촌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산림청은 산촌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기관이라기보다는 숲을 보전하고 가꾸는 기관이다. 그만큼 산촌은 70년대와 80년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삶의 공간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주변에 산촌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도 별로 만나지 못한 걸 보면 산촌은 주거공간으로 여겨진 지 오래됐다.

 

몇 년 전 여름휴가 때 깊은 산중의 절집에 들어가서 지낸 적이 있다. 읽고 싶었던 책 몇 권만 달랑 챙겨들고 떠난 휴가였다. 하루 스물 네시간이 모자라서 허덕이면서 살던 도시에서의 삶에 지쳐서 45일 동안 묵언수행을 하면서 놀맨놀맨 지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번잡스런 삶에 익숙해진 도시인에게 45일은 고역이었다. 요사채 방에서는 기침소리조차 너무나 큰 소음이었고,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책만 읽는다는 것은 고문이었다. 신문도 TV도 스마트 폰도 없이 며칠을 보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도시인에게 산촌의 밤은 길고도 길었다. 절집에 걸린 풍경소리만이 유일한 벗이었던 그 며칠간 오랫동안 도시의 휘황한 불빛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을 탓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며칠 더 지내라면 사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산촌은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종합편성채널인 채널A에서 방영하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주 시청층은 도시에 사는 중년 남성들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 역시 TV채널을 돌리다가 이 프로그램이 나오면 채널을 고정한다. 대개 프로그램의 주인공들이 사는 곳은 깊은 산중에서 혼자 지내는 중년 남성들이다. 내 기억으로는 여성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초로의 남성들이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이야기에 왜 중년 남성들이 열광할까?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이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청장년 시절을 보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 산 속으로 들어와 집을 짓고 고립을 선택한 이들이다.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도시생활로 인해 병든 몸을 자연 속에서 치유한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곳에서의 생활에 크게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중이기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당연히 TV도 없고, 스마트 폰도 없다. 그네들은 치열한 경쟁과 원치 않는 인간관계, 돈이 대접받는 도시에서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삶을 택했고, 그 속에서 자연의 신비로운 이치에 매료되어 살아가는 도인들이다. 물론 그곳에 살기 위해서는 깊은 고독을 이겨내야 하고, 세상사와 단절해야 한다. 몰욕과 탐욕이 남아 있다면 그곳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처럼 깊은 산중으로 숨어든 것은 아니지만 내 주변에는 지리산과 살악산, 계룡산과 태백산 자락으로 이주한 이들이 많다. 누군가는 양봉을 시작했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목공소를 차렸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도시에서 하던 일을 산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원고를 쓰거나, 책을 만드는 이들도 있다. 역설적으로 온라인이 보편화 되고, 교통이 편리해 지면서 굳이 도시 한 가운데서 부대끼면서 살지 않아도 산자락으로 이주해서도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또 펜션을 운영하면서 도시에 사는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지인들도 있다.

 

이제 산촌은 전통적인 주거공간으로서의 지위는 잃었다 하더라도 디지털 노마드 시대의 새로운 이주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여름 찾았던 경남 하동의 최참판 댁 너른 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펜션은 매일매일 눈 뜨고 싶었던 집이었다. 와이파이도 팡팡 터지고, 시원한 에어콘도 있으며, 저녁이면 별들이 쏟아지고 아침에 눈을 뜨면 지리산 자락을 감싸는 운무를 보며 감탄할 수 있는 집이었다. 그 집 아이들은 넓은 운동장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봄이면 벚꽃이 십리 길을 수놓고 눈을 들면 푸른 녹차밭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당대의 산촌은 힐링의 공간이자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런 산촌을 다시 우리들의 주거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사람은 낳아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낳아서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사라져야 한다. 물질만능의 교육보다는 인본주의 교육이 부활해야 하고, 건설과 토목이 앞서는 나라가 아닌 인문과 교양이 대접받는 나라가 돼야 한다. 끝으로 오래 전에 써놓은 졸시 한 편으로 산촌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1

우리들 삶은 부질없이 부는 바람과 같아 / 어느 땅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 어느 하늘에서도 잠들지 못한다 / 가없이 넓은 하늘과 땅이 있지만 / 우리가 머물 곳은 아무 데도 없고 / 바람이 불을 일으켜 땅을 만들면 / 그 땅을 일구어 자식들을 길들이고 / 아침마다 산허리를 감싸는 안개와 / 흰 서리의 섬뜩한 촉감을 사랑하며 / 또 하나의 집을 허물 뿐이다

2

서러워 말아라 / 머리를 두고 눕는 곳이면 어디나 고향이고 / 너희가 불로 다스릴 수 있는 /

모든 땅들이 너희들 것이니 / 지나간 세월을 한탄하지 말고 / 무리지어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 말아라 / 그들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 안개와 바람과 숲을 / 기억하지 못하고 / 지상의 모든 꿈들을 / 하나 둘 잊어버리며 / 잊은 것만큼 죽어가고 있으니

3

우리는 죽어서 바람 속으로 떠난다 / 우리들 신인 불에 몸을 사르고 / 희디 흰 뼈로 남아서 / 양지 바른 바위 위에 누워 있으면 / 바람은 밀려와 나를 껴안고 / 뜨거운 사랑으로 나는 녹아서 / 바람 속으로 바람 속으로 떠날 것이다 / 어느 하늘에도 머물지 않고 / 어느 땅에서도 잠들지 않으며 / 이 산과 저 산 사이를 맴돌다가 / 지상의 자욱한 안개로 남아 / 삶의 빛나는 아침마다 / 이 땅의 사랑을 준비하리라. -화전민의 꿈

 

 

Posted by 오광수

다시 활판이 그립다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1980년대 중반 내가 처음 신문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그 당시 신문사의 많은 부서 중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곳이 문선부(文選部)였다. 문장을 고르는 부서인가? 그러나 문선부의 풍경은 보통의 사무실과는 사뭇 달랐다. 켜켜이 쌓여 있는 납활자들과 그 사이사이 부지런히 손을 놀려 납활자를 고르는 문선공 형님들. 문선부는 신문이나 인쇄공장 등에서 원고대로 활자를 골라내는 부서였다.

무협지 풍으로 얘기하면 칼로 바람을 가르듯 활자를 골라내서 순식간에 목판에 조판을 해서 문장을 완성하는 문선공 형님들의 신공(神功)은 정말 놀라웠다. 기자가 쓴 원고의 속도보다 활자를 골라내서 조판을 하는 문선공들의 손놀림이 더 빨랐다.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자음과 모음들이 활자 크기대로 빼곡하게 꽂혀있는데 눈길도 주지 않고 정확하게 핀셋으로 골라내서 문장을 완성하는 솜씨야말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신문사는 그 특성상 속도가 생명이다. 마감 무렵 원고지에 기사를 써서 들고 가면 문선부에서 조판을 한 뒤 시험인쇄를 해서 게라지-게라는 활자조판을 담는 춤이 낮고 모가 진 상자, 이 상자에 활자를 조합한 뒤 종이에 시험인쇄를 한 것이 게라지다-를 뽑아준다. 그러면 기자는 그 자리에서 교열을 본 뒤 오케이를 놓는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기자가 쓴 원고의 오자까지 잡아내던 문선공 형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사에 문선부도 사라지고, 납활자와 게라지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 옵션인쇄를 지나 컴퓨터 조판이 자리잡는데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납활자가 몸에 안좋다며 퇴근길에 돼지고기에 소주를 마시던 그 분들이야말로 활판시대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활판인쇄가 된 책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비록 디지털시대의 책과는 선명도나 균형미에 있어서 차이가 보이지만 활자에 대한 존경심은 그때가 훨씬 나았다.

 

 지난해 초판본 모습 그대로 복원된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백석의 <사슴> 등의 시집이 큰 인기를 얻었다. 1920년대와 30년대 첫 출간된 허름하고 촌스런 시집이 왜 이렇게 많이 팔린걸까? 책을 구매하는 젊은층들은 예쁘고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활자본에 대한 향수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 땀 한 땀 쓴 시를 한 자 한 자 골라서 만든 책이 주는 무게감은 요즘의 그것과 다르다. 예전에는 책을 한 권 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요즘엔 마음만 먹으면 단 며칠 사이에도 책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온라인상에서 얼마든지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쓴 글을 많은 이들에게 보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작업 과정 역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해졌다. 결론적으로 속도의 시대에 느림에 대한 갈망이 10만부가 넘는 대박상품을 만든 것이다. 한때 드라마나 영화들이 앞 다투어 근대문화의 일상을 소재로 제작하여 히트상품을 만들어낸 트랜드와도 연관이 있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모든 신문이 가로쓰기를 채택하고 있지만 1980년대 후반 순한글 가로쓰기 신문인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기 이전까지 세로쓰기에 한자를 병용했다. 지금도 네이 라이브러리 옛날신문을 검색하다보면 세로쓰기 신문시절의 기사와 신문을 원본 그대로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사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지털 시대의 기사와 활판시대의 기사는 사뭇 다르다. 근대 이후 신문들을 보면 지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촘촘하게 기사를 배치하고, 문장도 간결했다. 동판(銅版)을 떠서 인쇄를 해야 하는 작업상의 공정 때문이었겠지만 그림 하나 사진 한 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기사들, 특히 온라인 기사들을 보면 그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과 길이의 한계가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날림공사를 한 집처럼 허술하다. 그림이나 사진 등도 고르고 골라서 책을 만들고 신문을 만들던 시대와는 사뭇 달라진 느낌이다.

 

 BBC나 타임지 등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지난 천 년간 인류문화사에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금속활자를 꼽고 있다. 그리고 지금 금속활자 이후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디지털 시대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다.

 1377<직지>를 인쇄하여 금속활자 인쇄문화를 꽃피운 대한민국에서 근대적인 인쇄시설인 박문국을 설립하고 <한성순보>를 발행하기 시작한 건 1883년이었다. 중세 때부터 인쇄문화로 인해 급격한 발전을 이룬 유럽의 문화에 비한다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일본의 식민지 시대 저항의 산물인 <독립신문>이야말로 <직지>를 만들어낸 후손임을 증명하는 쾌거였다.

 활판의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체험했다. 문맹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만큼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급성장하면서 지식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만약 우리에게 집집마다 배달되던 신문이나 싼값으로 사볼 수 있는 책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독립신문>이 대한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동안 국민들은 신문을 통해 뉴스를 접하고, 소설을 읽었고, 선각자들의 칼럼을 읽으면서 생각들을 성숙시켜 왔다. 심훈의 <상록수>부터 이광수의 <무정>, 정비석의 <자유부인>, 최인호의 <별들이 고향>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을 바꾼 수많은 소설들이 신문을 통해 연재됐다. 또 한편으로는 TV, 라디오, 화장품, 영화 등에 이르는 신문물의 광고들이 신문에 실리면서 도시인들은 물론이고, 농어촌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신문의 논객들이 칼럼을 통해 정치의식을 고취시킨 덕분에 역사의 고비마다 독립을 외치고, 민주화를 외칠 수 있는 시민의식을 만들어냈다. 그뿐이랴. 활판으로 인쇄된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해 우리는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을 체득할 수 있었다. 요즘도 가끔 옛날 신문이나 잡지에 실려 있는 광고들을 보면서 무릎을 친다. 그 발상의 기발함은 물론 문구 하나하나에 기지가 넘친다.

 

 이 모든 것들의 이면에 매일 밤을 새면서 신문을 만들고, 책을 만들던 이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특히 문선공 혹은 식자공(植字工)들의 노고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온몸에 검은 잉크를 묻히면서 책을 인쇄하고, 신문을 인쇄하던 인쇄공들의 노고도 더해진 결과다.

 오늘 다시 근대의 낭만을 생각한다. 그 시절 아버지들은 아침마다 잉크 냄새가 가득한 신문을 주워들고 첫 면부터 끝 면까지 샅샅이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명동의 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방금 출판사에서 받은 교정지를 받아들고 빨간 볼펜으로 교정을 보던 시인이나 소설가들도 떠오른다. 또 신문 하단에 게재된 양장점이나 양복점 광고 문안을 읽으면서 새 옷을 맞추러 가볼까 고민하는 신사와 숙녀도 있었을 것이다. 그뿐이랴.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영화 광고를 보면서 첫 데이트를 꿈꾸던 처녀와 총각들도 많았을 것이다.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로 시작하는 새 교과서를 받아들고 꿈에 부풀었던 아이들은 어느새 청춘을 다 보내고 노년의 문턱에 와 있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옛것을 보듬으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이 아닐까. 결국 오늘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기에.

 

 

Posted by 오광수

 

 

 

그녀가 떠났다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욕망이란 이름이 전차를 타고

-연극배우 윤소정

 

태초에 그녀를 장미라고 이름하고

신은 가시를 심어주었다.

가시 뒤에 욕망을 숨겨 놓았다

사막 위에 홀로 피어

도도하게 살도록 운명을 주고

그 이름과 분위기에 걸맞게

인생의 무대를 사랑하라 말했다

때론 수녀도 되고, 창녀도 되면서

신이 주신 사막 위의 생을

가시 끝에 달린 욕망을

온몸으로 뜨겁게 사랑했다

붉은 장미가 욕망의 힘으로 불타서

검은 장미가 될 때까지

그 장미가 뜨겁게 부서져

모래알이 될 때까지

그녀는 장미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 하지만 

 배우를 인터뷰 하고 

 기사 대신 시를 썼다.

 그 칼럼을 위해 윤소정을 만났다.

 오늘 장미가 부서져 모래알이 되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Posted by 오광수

결혼식 축시의 어떤 예

 

 

 

 

 

이렇게 좋은 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기어이 올 줄 알았습니다

가을 하늘을 떠돌던 두 개의 별이 만나

초저녁 달빛 사이로 빛나는 이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참 먼 길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 개나리는 수 없이 피고 지고,

단풍잎은 또 얼마나 얼굴을 붉혔는지요

몇 천의 붉을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였는지

다 알지도 못합니다

그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해야 시작된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는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렇게 진득한 사랑을 시작했으니

모닥불처럼 타오르다 이내 식어버리는 그런 사랑 말고

폭풍우처럼 밀려와 나무를 뽑는 그런 사랑 말고

시골집 안방에 놓인 화로처럼 은근하고도 뜨거운 사랑

막 쪄낸 콩고물에 무친 인절미처럼 쫀득한 사랑

오늘, 사랑은 궁상각치우로 시작됩니다

 

온통 가을로 차고 넘치는 오늘

둘이서 써 내린 사랑이 너무 눈부셔서

은행잎도 질투하며 노랗게 물들어갑니다

견우와 직녀처럼, 연오랑과 세오녀처럼

저리 아름답게 마주 선 그대들이여

다시는 그 손 놓지 마시지요

 

그 뜨거운 사랑으로 불을 지펴서

섣달 그믐 어두운 밤 환히 밝히고

그 뜨거운 사랑으로 얼음을 녹여서

세상 속으로 시원하게 흘러 가시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날, 좋아서 눈물도 나는 날

기어이 기어이 올 줄 알았습니다.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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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광수

가을은 늙지 않는다

 

오광수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가을저녁 마음을 다쳐 끝내 몸살이다

까치밥으로 남은 홍시 하나

늑골 근처서 달랑거리다 툭,

온몸 적시며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가을은 하필 늙지도 않고 찾아와서

내 낡은 관절을 쑤시며 콕,

첫사랑을 배신한 죄를 묻는가


모과향 나던 젖가슴을 가진 여자가

마른 기침으로 찾아온 새벽

거봐라 하며 지나가던 가을이

아직 푸른 처녀의 허리에 손을 감아 콱,

붉디 붉은 단풍들로 숨이 막힌다


절정에 오른 나무들이 얼굴 붉히며

흰눈 같은 혁명을 기다리는 새벽

늙지도 않는 가을 때문에

마음 다친 사내가

폭설에 갇혀 길을 잃는다


젊은 가을 때문에 사무치면 지는 거라고

비루한 몸들이 소리치지만

속 빨간 단풍을 어찌할 수 없다

어느새 흰눈이 머리를 덮고

첫사랑의 화인(火印)도 천천히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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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호박

 

오광수

 

 밥솥에서 쪄 낸 호박잎에 보리밥을 올리고 강된장 한 숟가락 척 얹어서 입에 넣는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혀끝에 머물더니 사박사박 씹히면서 목넘김이 부드럽다. 전해오는 식감을 따라 마음밭은 한달음에 고향집 뒤꼍 장독대까지 내닫는다. 할머니가 심은 호박씨에 할아버지가 똥지게 몇 번 져 나르면 씩씩한 호박순들이 투덜거리며 올라왔다.

 

 그땐 몰랐다. 냄새 나는 똥 속에서 뒹굴어야 새순이 돋고 열매가 맺힌다는 걸. 벌들이 아양 떨면서 노란 호박잎에 입맞춤하면 잘생긴 애호박 하나 뚝딱 만들어졌다. 호박잎 사이 숨바꼭질 하면서 용케도 살아남은 호박들은 노랗고 탐스런 호박으로 늙었다. 나중에 알았다. 별 일 없이 늙어간다는 게 호박에게도 쉽지 않다는 걸.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가 탐스런 여름날 할머니가 뚝뚝 호박순을 꺾어주면 할아버지가 담장에 지지대를 받쳐서 하늘길을 터주었다. 부지런한 녀석들은 땅거미가 지면 하늘로 올라가 달이 되었다. 이제 할머니는 별들을 솎아 견우직녀에게 주고 구름 반죽을 밀어 손수제비를 뜨신다. 손수제비에 애호박을 썰어 넣어야 하나가 된다는 걸 예전엔 왜 몰랐을까. 할아버지라고 그냥 계실까. 별똥별을 만들어 지붕 위로 던지시고 볏짚을 태워 저녁하늘에 쥐불을 놓으신다. 요즘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그 분들이 떠난 길이 비로소 보인다.

 

 올 겨울엔 늙은 호박씨 챙겨서 신문지에 잘 싸놔야겠다. 걱정이다. 호박씨 까면서 버텨온 비루한 청춘이 곰삭아 늙어서도 다 퍼주는 호박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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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의 왕따, 우리의 이중성

 

 

배우 김민희.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우리 사회에서 이름 석자를 내걸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이름 석자에 대한 책임감이 어느 사회보다 높기 때문이다. 조영남을 시작으로 박유천, 홍상수와 김민희, 김성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모 아니면 도의 사회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한 사람이 일생을 살다보면 잘 한 일보다 실수하는 일이 더 많고, 남의 모범이 되는 일보다 지탄을 받을 일을 더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 역시 날이면 날마다 실수하면서 산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아내에게 죄를 짓는다. 자식에게 떳떳한 아버지도 못된다. 술 먹고 실수하고, 교통법규를 위반하고, 친구들에게 못할 짓을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익명성을 보장받기에 법망에 걸려들어 경찰서에 끌려가거나 법정에 설 일을 하지 않는다면 대개 공자의 말씀처럼 하루 세 번 반성하고 살면 된다. 아니 일주일에 한 번만 반성하면 된다. 모르긴 몰라도 웬만한 사람들이 음주운전을 한다 해도 각종 미디어에 대서특필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름 석자를 내걸고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반성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이 실수나 잘못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그들은 혹독한 여론재판에 시달린다. 특히 연예인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하다. 최근 조영남 사건이나 박유천 사건이 각종 미디어에 보도된 기사건수가 1,000~3,000건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지면을 갖고 있거나 온라인미디어들이 앞다퉈 사건을 보도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경찰이나 검찰의 조사도 시작되기 전에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기사들이 넘쳐난다. 심지어 마치 윤리선생이라도 된 듯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죄를 묻는 기사들도 넘쳐난다. 김민희의 경우 불륜녀로 낙인찍혀서 더 이상의 연기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단정 짓는다. 그녀의 불륜은 이미 간통죄 폐지로 고소할 수도 없고, 누군가가 넌 불륜녀이니 더이상 연기할 수 없다고 판결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물론 '불륜'이 잘 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이유로 그녀가 평생 다져온 일터를 빼앗을 수는 없다. 만일 피해 당사자 매일매일 넘쳐나는 온갖 기사를 스크랩하여 일괄적으로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한다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보상금이 나오지 않을까.

 

 이쯤 되니 이문열의 소설 <익명의 섬>의 여주인공인 여교사와 같은 비밀을 갖기에는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혹독한 여론재판이 세상의 모든 유명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가끔, 아니 자주 찌라시를 접한다. 그런데 그 찌라시에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많다. 도대체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소설처럼 써서 올리는 그 누군가의 창작능력이 감탄스러울 정도다. 대개 그 피해자는 정치인이나 관리, 아니면 사회적으로 유명한 경제인들이 아닌 연예인들이다. 그런데 SNS 등을 통해 유포되는 연예인 찌라시를 본 사람들은 보는 순간 객관화 한다. 이틀이 멀다하고 그게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미디어에 대서특필 되지 않아도 연예인들은 이상한 변태가 되어 있거나, 천하의 바람둥이가 돼 있거나, 파렴치범이 되기도 한다.

 이상한 것은 우리 사회가 연예들에게 유독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나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할 사람은 정계, 재계, 관계 혹은 법조계의 고위직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개 우리가 내는 세금을 만지거나, 그 세금을 쓰는 일을 결정하거나, 그것들이 잘못 쓰였을 때 단죄를 해야할 사람들이다. 그들이 법을 어겼을 때 애먼 이들이게 큰 피해가 돌아온다. 그들이 정책적인 결정을 잘못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소위 재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불법적인 경영을 하면 고스란히 주주들, 더 넓게는 국민들의 주머니를 위협한다.

 

 연예인들을 평소 딴따라라고 폄훼한다. 딴따라에는 유교적 사회에서 광대를 천시하던 시각이 반영돼 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이들에 대한 친밀감이 반영된 표현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이 자유롭고 즐거워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삶이 수많은 감시카메라와 파파라치에 둘러싸여 전혀 즐겁지가 않다. 누군가는 청소년들에게 모범이 돼야하는 사회적 책임감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잘못을 꾸짖지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다. 그들이 우리들의 윤리선생이나 도덕선생이 아니다. 내 경험으로 너무나 바른 생활을 하는 연예인은 좋은 연기도, 좋은 노래도 부르지 못한다. 사랑도 해보고, 이별도 해보고, 사업에 망해보고,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껴봐야 좋은 노래도 부르고, 훌륭한 연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딴따라에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여 왕따시키는 재미에 빠져 있다. 한때는 노래가 좋다, 연기가 좋다, 한류에 이바지 한다고 박수를 치다가도 그들의 실수나 잘못이 생기면 한꺼번에 달려들어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는다. 너는 이제 절대로 우리와 더불어 살 수 없으니 꺼지라고 발길질을 한다. 그렇게 해야할 그룹들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유명인들의 사생활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 나이 또래의 홍상수감독의 연애와 불륜 기사를 접하면서 부럽거나 욕하면 지는거다라고 생각했다. ,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그들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자. 그냥 있는 그대로 그들을 받아들이자. 조영남이 대작을 그려서 팔았다면 그걸 모르고 속아서 샀다고 생각한 사람과 해결하면 될 일이다. 조영남이 얄밉다면 술자리에서 즐겁게(?) 씹고서 끝낼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차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을 망가뜨리는 거대 자본, 거대 권력과 싸우는 일이다. 우리의 숨구멍을 막는 미세먼지의 주범들과 싸우고, 내 호주머니를 축내는 세금도둑들을 몰아내는데 열중하고, 국민들의 녹을 먹으면서 뒤로 딴주머니를 채우는 도둑들과 싸울 일이다. 

 

 

 

 

 

 

Posted by 오광수

홍만표와 조들호현실과 판타지 사이

 

 

 

 

                    <동네변호사 조들호>의 주인공 박신양

 

 

 

 

KBS2 월화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를 보면서 갑자기 욕지거리가 나왔다. 작가나 프로듀서, 열연한 배우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시청자들에게 이런 판타지를 보여줘서 뭘 어쩌겠다는건지? 화가 났다. 말하자면 변호사 조들호(박신양)가 재벌총수와 지검장의 검은 고리를 밝혀내면서 그들을 통쾌하게 단죄한다는 뻔한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근간이다. 드라마의 외양은 분명 리얼리티를 앞세운 현실고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드라마의 맥락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초극강 판타지일 뿐이다. 드라마가 현실 세상을 반영하는 리얼리티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드라마는 설정 자체가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공허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  

 우선 이런 드라마를 공영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다는 게 화가 났다. 게다가 드라마 제작사를 보니 SM엔터테인먼트다. 그 곳은 어디인가? 철저하게 소녀들의 판타지를 자극하여 수입을 올리는 상업적인 연예기획사다. 그 회사는 음악에 대한 사회적 기능, 가령 힐링이나 위안 등을 음악에 반영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어쩌면 드라마 제작진들이 항변할지 모른다. 법조비리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지금 통쾌하게 가진 자들을 향해 복수하는 드라마라고. 어느 드라마보다 리얼리티도 강하고, 현실인식도 강한 드라마라고. 그러나 반어법이 지나치면 보고 듣는 사람이 상처를 받는다. 이건 신데렐라가 구두 한 짝 때문에 왕자님을 만나 행복해지는 이야기와 차원이 다르다. 드라마를 보면서 상처를 받다 못해 화가 나고 분노가 치솟았다. 이제 사탕발림으로 시청자를 우롱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제작진들은 드라마를 쓰고 만들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홍만표와 최유정 변호사의 기사를 접하며 화가 나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백억 혹은 이백억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은 그들이 타고난 머리회전을 무기삼아 지난 5년간 벌어들인 불법적인 수익이다. 검찰에서 온갖 탈법과 불법을 배운 뒤에 이를 활용하여 허가낸 도둑질을 한 결과다. ‘그들만의 리그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만들어낸 걸작(?)이다. 열아홉살 소년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컵라면을 싸기지고 다니면서 지하철에서 작업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 나라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운호나 최유정과 홍만표 변호사 등이 보여주는 진흙탕 싸움이야말로 정말 리얼한 드라마이자 우리들의 맨얼굴이다.

 세상에 이리저리 깨지면서도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희망고문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이땅의 청춘들에게 어른들이라면 이제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세상에 권선징악 따위는 없다고. 좀더 이를 악물고 독해져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악착같이 살지 않으면 언제 등 뒤에서 (누군가가) 칼을 들이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힘없는  여성들에게 호신용으로 무기라도 하나씩 가지고 다니라고 조언해야 한다.

 세상 어디에도 조들호 같은 변호사가 없다고 알려줘야 한다. 국가가 위험에 처한 국민을 위해 특수부대를 파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혹 죄를 짓고 법정에 서게 된다면 (조들호 같은 변호사가 필요한게 아니라) 돈이 있어야 형량을 줄일 수 있으니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수많은 아이돌들이 양산하는 음악이 소녀들이 알고 있는 음악의 전부가 아니라고 알려줘야 한다. 도덕 교과서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서 청춘들을 현혹해서는 안된다.  

 

 

 

 

 

 

 

Posted by 오광수

 

 

안성기, 배우로서의 시간 59년째

 

 

 

 

              배우 안성기 /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배우 안성기(64)를 도형으로 표현한다면 정육각면체 같은 사람이 아닐까. 변의 길이와 내각의 크기가 모두 같은 정육각면체처럼 안성기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반듯한 인간의 전형이다. 모든 후배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배우의 멘토이자 한 시대를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초로의 사내로서도 흠결이 없다. 배우로서도 삼각형이나 사각형보다 더 다채로운 이미지를 품고 있어서 보는 이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마력도 있다. 마치 정육각면체를 이루고 있는 벌집처럼 늘 달콤한 꿀을 품고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배우로서의 시간 59년째. 1957년 영화 <황혼열차>에서 아역으로 데뷔한 이후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해왔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나 <고래사냥>의 젊은 안성기부터 <칠수와 만수><만디라>에서 개성 넘치는 안성기로, <하얀전쟁>이나 <남부군>에서의 중후한 안성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배우로서의 필모그라피는 정육각면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년이 영화배우로서 60주년을 맞는 해이다. 각종 영화제는 물론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자리에는 언제든지 안성기가 있다. 또 많은 후배들의 결혼식이나 상가에 제일 먼저 달려오는 사람이 안성기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 아시아나 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유니세프 홍보대사 등 주로 시간을 쪼개서 봉사해야 하는 직함도 여러개다.

겨울이 끝나가는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안성기는 꽃중년답게 청바지와 폴라티, 트랜디한 점퍼를 차려입고 나타났다. 사람 좋게 씩 웃는 그에게서 아직도 청년 안성기가 보였다.

 

-아직도 청년 같은 몸매를 유지하고 계신데 비결은?

매일 한 시간여씩 헬스클럽에 가서 꾸준히 운동을 합니다. 러닝머신에서 한 시간 정도 땀을 흘린 뒤 웨이트 트레이닝을 병행하죠. 헬스클럽 쉬는 날은 빼구요. 싱글벙글이라고 배우들을 중심으로한 골프모임이 있어요. 박중훈, 장동건, 차태현, 황정민, 김민종, 김수로, 현빈 등 한창 활동하는 후배 배우들이 거의 다 회원으로 들어와 있죠. 제가 맏형입니다. 촬영스케줄이 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필드에 나갑니다.

-영화 <사냥> 촬영을 끝내셨다구요. 촬영하시면서 상당히 고생이 많으셨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어떤 역할이었는지요?

허허, 많이 뛰어 다녔죠. 이우철이라는 신인감독 작품인데 금맥이 발견된 탄광을 배경으로 이를 차지하려 싸우는 주민과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저는 노인 사냥꾼으로 나오죠. 탄광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 하다가 후배의 희생으로 살아난 뒤 그의 딸(한예리 분)을 키우면서 살아가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딸이 자신의 손녀였던 겁니다. 탄광 장면 등을 찍기 위해 화순탄광이나 깊은 산 속에서 주로 뛰어다니면서 촬영을 많이 했어요. 조진웅, 손현주 등 후배들과 촬영했는데 그 친구들이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작품 고르실 때 기준은?

작품의 완성도를 많이 생각합니다. 저예산 영화라도 좋은 영화는 출연한다는 생각입니다. 다음 작품이 <매미소리>라고 다큐멘터리 인디영화로 큰 화제를 모았던 <워낭소리>의 이충열 감독이 만드는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어요.

 

-지난해에는 할리우드 영화 <7기사단>에도 출연하셨는데요?

허허. 그 영화가 개봉은 했는데 큰 반향이 없이 묻혀버린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모건 프리먼이나 클라이브 오웬 같은 유명배우들도 많이 나오는데. 사실 워낙 제가 합류가 늦어져서 의상이나 헤어컨셉이 미진해서 좀 아쉬웠어요. 그리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잘 하려고 하다 보니 힘들었죠. 앞으로 그런 기회가 또 온다면 좋은 작품과 역할로 좀더 잘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배우로서도 좋은 경험이었죠.

 

-<화장>의 임권택 감독이나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을 빼면 이제 대부분 후배 감독과 연기하는 일이 많으시죠. 장단점이 있을 텐데요.

현장에 가면 늘 제 나이가 가장 많아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닐까 해요. 영화예술이라는게 나이가 든 사람들의 지혜로움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섞여야만 하는데 요즘엔 그런 부분이 없어서 아쉽죠. 제가 아는 촬영감독이나 스테프들 모두 은퇴 아닌 은퇴를 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찍으니까 장면들이 힘도 있고 스피드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백이 없어 보여서 아쉬워요. 영화의 깊은 감동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합쳐쳐야 나오거든요. 그런데 요즘 그 쪽이 약하다보니 예전에 비해 작품성 있고, 세계성 있는 작품이 드물어졌죠. 천만영화는 많아졌지만 우리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관통하는 연기인생을 보내고 계신데요? 어려운 점은?

영화가 디지털화 되면서 우리 영화가 국제적인 경쟁력 갖게 됐죠. 이제는 헐리우드 영화와 뒤질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한 편으로는 정확한 콘티를 가지고 필름을 아껴가면서 찍지 않고 마구잡이로 찍다보니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집중력도 떨어지는 단점도 있어요. 특히 배우들이 쉴 틈이 없어서 힘들죠.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어도 영화의 정서 자체는 아날로그 적인게 묻어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사라지는 것 같아 상당히 아쉬워요.

 

-많은 후배들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멘토를 안성기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 말 들으시면서 부담감이 없으신지요?

왜 부담이 없겠어요. 더욱 잘해야 겠다는 생각을 늘 하죠. 또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배우의 정년을 연장해놔야 하겠다는 사명감도 있어요. 우리는 배우가 너무 단명하는 것 같아요.

 

-뭐든지 한 번 시작하시면 줄기차게 하시는 거 같아요. 유니세프 홍보대사도 그렇고, 동서식품 광고모델도 그렇구요.

재능기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거라고 봐요. 유니세프는 저와 같은 전쟁세대들이 어린 시절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국제구호단체입니다. 우리가 굉장히 힘들었을 때 손길을 준 세상에 대한 보답으로 서로의 아픔을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1992년부터 홍보대사로 활동했어요. 실제로는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기부하고 활동했습니다. 동서식품 광고도 1983년 시작했으니 꽤 오래한 셈이죠.

 

-평소에 독서는?

예전에는 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인물 분석에도 도움이 되고. 요즈음은 예술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어요.

 

-오랫동안 천주교 신자로서 생활해오셨는데 삶의 어떤 힘으로 작용하는지?

살아가면서 한 번씩 어렵고 힘들 때마다 저를 좀더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줍니다. 결혼 하면서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았어요. 그런데 집안애 신부님도 계시고 수녀님도 계셨죠. 저도 영세가 늦었을 뿐이죠.

 

-두 아드님들이 모두 예술계통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한 명 정도는 다른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으셨는지요?

두 아들이 무조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저와 아내의 생각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큰 아들은 그림을 전공하고 있고, 둘째는 사진을 전공한 뒤 지금은 영화 쪽 공부를 하고 있어요. 큰 아들 녀석은 제가 객관적으로 봐도 그림을 꽤 잘 그리는 것 같아요. 잘하면 그림으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둘째는 아직 모르겠어요. 잘 하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쪽에서 일할 것 같아요.

 

-예술적 재능은 누구를 닮은 건가요?

글쎄요. 골고루 닮은 거겠죠. 제 처도 조소를 전공했으니까요.

 

-자녀들에게 어떤 어버지인가요?

정겹게는 못하는 거 같고 조금은 엄한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해요. 친구처럼 지내면서 자식들과 거리감이 없는 부모들이 많은데 저는 나이가 들어서 얻은 자식들이어서인지 그렇지는 못해요. 엄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아버지라고나 할까요.

 

-드라마나 뮤지컬 등 제의가 많았을텐데? 영화만 고집하신 이유는?

요즘은 드라마나 뮤지컬에 출연하자는 제안 자체가 없어요. 80년대에 주로 드라마 출연제의가 많았는데 웬지 너무 쉽게 볼 수 있고, 화면도 너무 작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 비해 영화는 관객의 선택으로 돈을 내고 들어와서 집중을 해서 보잖아요. 관객의 수고와 선택을 위해 제가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만 고집했죠. 또 얘기를 들어보면 쪽대본으로 시간에 쫓겨 밤샘촬영을 한다는데 저는 절대로 못할 거 같아요.

 

-지난해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둔 중년의 남자 연기를 하셨죠. 늙어간다는 것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을텐데요.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50대가 됐을 때 그 전과는 확 달라진 삶이 보이더군요. 이제는 오르막은 다 올라왔고 내려가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꾸만 되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다짐을 했죠. 그래도 모든 일에 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어요. 인터뷰나 영화를 고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실수나 실패를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젊은 시절에는 실패해도 다시 복구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그게 쉽지 않거든요. 그러다보니 사람이 굼떠져요. 그래도 하나 변치 않는 건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거겠죠.

 

-사람들에게 늘 바른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데 이런 것들이 가끔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지금 맡은 역할에 충실해야겠다는 각성을 가져다주죠. 제가 악역을 잘 안하는 이유는 제가 별로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머가 있는 코미디영화를 좋아해요. 그런데 그런 영화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청룽(성룡)이 한 가지 캐릭터만 하는 이유는 그것만해도 시간이 너무 없기 때문이라잖아요.

 

 

- 너무 바쁘셔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으실텐데요.

제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늘 노력하죠. 배우에게 바쁜 건 독약입니다.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빈둥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죠. 저는 항상 기지개를 켜기 직전 같은 상태로 몸을 만들어 놔요. 많은 상상을 통해서 생각의 깊이를 만들어놔야 연기할 때 저 깊은 곳에서 꺼내놓을게 생기거든요.

 

-나이 들면 친구밖에 없다는데 친구들과는 자주 만나시는지요?

그럼요.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요. 정년퇴직한 친구도 있고, 사업하는 친구도 있구요. 소주도 마셔가면서 옛날 얘기도 하고, 요즘 사는 얘기도 하죠. 제가 초등학교 동창은 별로 없고, 중학교 동창들이 많아요. 초등학교 때는 영화촬영 다니느라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거든요?

 

-, 가수 조용필씨가 중학교 같은반 친구였다면서요?

. 경동중학교 2학년때 같은 반 친구였어요. 용필이는 그때 키가 지금 키랑 똑같아요. 강화도에 소풍가서 기타치고 놀면서 찍었던 사진이 지금도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있더라구요.

 

-신혼시절의 아내와 지금의 아내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60대가 넘으면 마누라한테 쥐어 사는 게 편하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살아가다보니 각자에게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서로 많아지면서 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생깁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저는 좀더 소심한 남편이 됐고, 제 아내는 좀더 씩씩한 아내가 된거죠. 되도록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재테크나 금전관리는 누가 하시는지?

, 그런 거는 서로 미루는 거 같은데요. 은행에서 한 달 동안 쓸 생활비를 찾아서 빼서 쓰는 거 외에 별다른 관리를 안합니다. 저나 집사람이나 재테크를 하는 성격이 못되거든요.

 

-자신의 전성기가 언제였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80년대를 시작으로 90년대까지 전성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도 기사를 보면 안성기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더군요. 그 말을 빌어서 안성기의 전성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아직도 작품에 대한 열정은 후배들 못지 않았다. 촬영현장에서 그는 후배들보다 더 잘 뛰고 더 잘 논다. 배우로서 끊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은 어쩌면 낙천적인 성격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모든 일에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 안성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스라고 말하는 습관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오광수

"이장희 선배가 내 인생의 멘토죠."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그녀에게 붙어다니는 수식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원조 섹시디바는 엄정화나 이효리, 현아와 같은 걸출한 후배 섹시 여가수가 탄생할 때마다 그녀에게 붙어다니는 수식어였다. ‘한국판 마돈나역시 춤과 노래를 겸비한 댄스여가수인 그녀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또 그녀는 ‘10대 댄스여가수의 효시였다. 데뷔가 열일곱살이었으니 그 나이 또래 가수 중에는 단연 으뜸이었다. 80년대부터 90년대 군생활을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그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통령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그녀의 이름 앞에 방부제 미모라는 수식어도 따라다닌다. 한창 바쁠 때는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헬기를 띄웠던 핫한 여가수였고, 한때는 루머조차도 메가톤급으로 따라다녔던 그녀였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은 중견가수 김완선(47). 그녀가 헐렁한 체크무늬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 ‘방부제 미모라는 찬사가 그저 나이 든 중년들에게 던지는 수식어이기 십상이지만 그녀에겐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음악적으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가수이자 몸매와 춤솜씨 또한 녹슬지 않은 그녀는 요즘 그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불타는 청춘’(SBS)을 보내고 있었다.

촬영장에서는 늘 도발적이고 섹시한 표정으로 도도한 느낌의 표정 연출에서 벗어나 발랄하고 상큼하면서도 활달하게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서인지 촬영 내내 그녀에게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참 편안하고 여유롭게 보였 다.

-데뷔 30주년을 맞았는데 감회가 새롭겠어요? 잘 믿겨지지 않네요.

3년 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30년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아요. 열일곱살 소녀가 축지법을 서서 내일모레면 오십세가 되는 중년으로 날아온 느낌이랄까. 저 스스로가 30주년 맞은 가수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퍼요. 30년이란 세월 동안 한 가지 일을 했으면 엄청난 내공을 쌓았어야 할텐데 저는 뭐 해놓은 게 없거든요. ‘일신우일신이라고 해마다 조금씩 발전한 모습을 팬 여러분께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아날로그 시대에 가수를 시작해서 디지털 시대까지 온 셈이네요. 디지털시대엔 잘 적응하고 계신지요?

세상이 많이 달라졌죠. 제가 처음 데뷔할 때 LP 음반을 냈는데 지금은 CD를 지나서 디지털 싱글 시대가 됐어요. 바둑 최고수를 인공지능 로봇이 꺾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여전히 아날로그인 것 같아요. 아날로그가 정감 있고 따뜻해요. 아직까지 컴퓨터를 쓰지 않고 노트를 쓰고 있어요. 노트에 메모도 하고 곡도 쓰고.”

-요즘엔 중고등학교 시절에 데뷔하는 후배 가수들이 대부분인데 격세지감을 느끼겠어요. 김완선씨가 데뷔할 당시만 해도 좀체로 없었잖아요?

저는 연습생 가수 1호였어요. 이모이자 매니저였던 한백희 사장님 덕분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철저하게 만들어졌어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연습하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개인교습으로 작곡 공부까지 했거든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희 이모가 확실히 시대를 앞서 가셨던 분인 것 같아요. 요즘 10대 후배 가수들은 부모님의 지원 아래 가수 준비를 하니까 훨씬 편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치열한 경쟁 속에 내몰리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울 때도 많아요.”

-30주년을 맞는 해여서 음악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계시는데요? 싱글로 발표하신 록발라드곡 강아지는 정말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어요.

가사 내용은 헤어진 연인이 그리워서 잊지 못하는 내용이죠. 그런데 실상은 이 땅의 유기견들을 위해 만든 노래죠. 뮤직비디오도 제 팬이 그런 내용을 담아 만화로 제작했는데 의외로 주변 반응이 좋았어요.”

-댄스곡도 발표하셨죠?

유즈 미라고. 킹캔이라는 젊은 친구가 쓴 곡이죠. 예전에 해왔던 제 댄스곡들이 어두운 면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밝고 경쾌한 댄스곡입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격렬한 댄스가 곁들여지는 곡은 아니죠, 저도 나이가 있잖아요. 요즘 10대들의 빌랄함을 제가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하하.”

 

 

   김완선 앨범 재킷

 

 

 

-2011년 컴백하면서 매년 거르지 않고 디지털싱글과 미니앨범을 내셨는데 음악적 변화가 느껴져요.

매번 실력 있는 후배가수들과 함께 작업했어요. 인디그룹이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가수들 하구요. 그룹 비스트의 용준형이랑 함께 부른 비콰이어트도 있었구요. 힙합풍의 노래 굿바이 마이 러브도 발표했어요. 미니앨범 속에 있는 에피톤 프로젝트와 작업한 오늘’, 클래지콰이와 함께 만든 캔 온리 필도 아끼는 노래죠. 댄스에 집중하기 보다는 음악과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어요. 이제 팬들이 저에게 춤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아요. 또 더 이상 섹시하지가 않잖아요. 하하.”

-얘기를 듣다보니 음악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지는 것 같군요?

잘 나가는 스타작곡가들과 할 수도 있었는데 안전하고 익숙한 음악을 저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데뷔 무렵에도 저에게 음악은 늘 중요한 요소였어요. 1집과 2집은 생전 다른 사람에게 곡을 주지 않았던 산울림 김창훈 선배 곡이었고, 3집은 그당시 미국에 계시면서 활동을 쉬고 계셨던 이장희 선생님 곡이었어요. 또 신중현 선생님 곡도 받았구요. 5집과 6집은 그당시 한 번도 곡을 써본 적이 없는 손무현과 작업했잖아요? 1백만장 이상 팔리는 앨범도 내봤으니 이제 좋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해봐야죠.”

-요즘 들어서 복고풍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80년대와 90년대 노래들이 많이 리메이크 되면서 사랑받는데 어떠신가요?

예전 노래가 다시 나오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제 노래 뿐 아니라 저랑 같이 활동하던 시대에 유행하던 노래들이 나오잖아요. 저도 어릴 때 스팅이나 킹 크림슨, 이글스, 퀸의 노래를 들으면서 음악을 좋아하게 됐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도 그럴 것 같아요. 저의 20대는 영광도 있었지만 상처도 많았죠. 댄스가수는 노래를 못한다는 편견, 또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편견 등이 저를 막아섰죠. 데뷔 때부터 주목 받았지만 5년만에야 순위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해봤거든요. ‘나만의 것’,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가 잇달아 1등을 했죠. 보수적인 어른들 때문에 평가절하 된 부분도 없지 않아요.”

-6월부터는 30주년 기념공연도 하신다구요?

. 611일 서울공연을 시작으로 대전과 대구, 부산과 광주에서도 공연할 예정입니다. 제가 해온 30년을 총 결산하는 무대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떨리고 기대돼요. 연말에는 그동안 냈던 싱글들을 모아서 기념앨범도 계획하고 있어요.”

-30주년을 결산하고 나면 결혼도 생각하셔야죠?

재미 있는 사람,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결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있어요. 그렇지만 꼭 해야겠다는 의무감은 없어요. 또 결혼은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아요. 하늘의 뜻이고, 신의 영역처럼 느껴져요.”

-부모님들이 서두르지는 않나요?

제 부모님들은 울릉도에 놀러가셨다가 너무 좋다면서 몇 년간 눌러 사시는 분들이죠. 그만큼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분들이거든요. 최근에 제 집 근처로 이사오셨는데 언니들이 다 결혼해서인지 다행히 결혼 얘기는 잘 안하시죠. 제가 딸 다섯 중에서 셋째딸이잖아요. 왜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제 막내 동생도 결혼해서 제 옆집에 살아요. 제 조카만 6명이다보니 아이에 대한 갈증도 좀 덜하죠.”

-예전에 집공개 하는 프로그램에서 보니까 경기도 용인 집이 아주 깔끔하고 세련됐던데요?

고양이가 여섯마리여서 대식구죠. 버려진 고양이를 주워서 키우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첫째가 레이, 둘째가 흰둥이, 셋째가 꼬맹이, 그리고 야들이 라크리 복덩이 이렇게 돼요. 처음엔 너무 애처로워서 돌려보내지 못하고 키우기 시작했는데 이젠 식구 같아서 너무 좋아요. 그런대 애 키우는 것 맡큼이나 힘들죠. 털도 치우고 목욕도 시켜야하고 배변도 치워야 하거든요. 집은 제가 하와이에서 디자인 공부한 실력으로 직접 꾸몄어요. 제가 인테리어는 관심이 많은데 요리는 영 젬병이에요.”

-요즘 출연 중인 SBS <불타는 청춘> 때문에 완선씨에 대한 대중의 시각이 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 예전에는 참 접근하기 힘든 도도한 여자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셨던 거 같아요. 또 한창 인기가 있었을 때 대만과 홍콩으로 건너가서 4년 동안 활동했고, 2년 넘는 시간 동안 디자인 공부하느라 하와이에서 살았잖아요. 그러다보니 저에 대한 이미지가 10년 저 너머에 머물러 있었어요. 근데 예능 프로그램에서 제가 털털하고 편안한 데다 이미지에 허당 이미지로 나오니까 요즘엔 다들 스스럼없이 대해주세요.”

-그러고보니 완선씨에 대해 한때 꼬리표처럼 악성루머가 떠돌아다녔죠? 왜 재벌의 아이를 가졌다느니 하던 소문요.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나요?

제가 대만과 홍콩에 나가있는 동안에 그 소문이 크게 돌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정작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지 몰랐어요.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지금처럼 활성화 돼있던 시절이 아니었거든요. 귀국해서야 그런 소문을 접했는데 그냥 웃고 넘겼어요.”

-예능, 그것도 나 중년이고, 아직 싱글입니다라고 얘기하는 프로그램에 나가는게 망설여지지 않았나요?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저는 이 프로그램이 너무 고마워요. 매주 제가 난생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 가서 편안하게 옛 선후배들과 맛있는 걸 먹고 놀이도 하면서 스트레스 없이 프로그램을 찍거든요. 제가 생각보다 여행을 많이 못해봤어요. 얼마 전에 쵤영차 가본 진안 마이산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뭔가 영험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어떨 때는 만약 일찍 결혼해서 애를 낳았다면 이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없었을텐데 하면서 안도하기도 해요.”

-프로그램 속에서 강수지씨와 스스럼없는 선후배로 지내시면서 친하신 것 같던데요.

수지 언니는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해서 친하지 않았어요.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 만나기 시작했고 최근 프로그램을 같이 하면서 더 친해졌죠. 근데 처음엔 언니 소리가 잘 안나왔어요. 도대체 언니처럼 보이지 않았거든요. 어떻게 그런 외모를 가진 여자를 열두살짜리 엄마이자 오십이 된 아줌마로 보겠어요. 저도 좀 어려보이는 편이지만 그 언니는 방부제 미모라는 표현이 딱 맞아요.”

-성악가 김동규씨와 탤런트 김광규씨가 완선씨를 사이에 두고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던데요? 둘 중에 누가 더 이상형에 가까운가요?

아빠가 좋은 지 엄마가 좋은 지 묻는 거 같아요. 동규 오빠랑 광규 오빠는 두 분 모두 따뜻하고 듬직하고 재미있어요. 차이가 있다면 동규 오빠는 장남이고 광규 오빠는 막내라는 정도? 그리고 동규 오빠는 프로그램을 하기 전부터 쭉 만나왔던 사이고, 광규 오삐는 프로그램 하면서 처음 봤어요. 제가 재미있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런 면에서 둘 다 마음에 들어요. , 조금 차이가 있다면 동규 오빠에겐 없는 애교가 광규 오빠에게 있다는 정도죠.”

-방송 프로그램에서 JYJ 같은 남자가수 후배들에게 사심을 보이기도 하셨는데 연하남이 데쉬한다면 어떨 거 같아요?

에이. JYJ를 좋아하는 거야말로 그냥 이모팬들이 젊은 남자가수들을 좋아하는 팬심과 다를 바가 없어요. 너무 나이 차이가 나면 저도 감당이 안될 것 같아요.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대개 남자친구라기보다는 남자인 친구들 뿐이죠. 손무현이나 이태윤 같은 또래 남자뮤지션들요. 후배가수한테 사심을 가졌다 해도 제가 데쉬하는 성격이 못돼서 거의 불가능해요.”

-어떤 경우에 나이가 느껴지나요?

보통 때는 나이를 잊고 살아요. 그런데 숫자라는게 묘해서 문득 그 숫자를 확인하면 어쩌다 내가 벌써 이런 나이가 됐을까 한숨도 나와요. 그리고 가끔 거울을 보다가 내 얼굴에서도 이제 세월이 느껴지는구나 생각해요. 그런데 결혼을 안하고 자식도 없어서인지 아직 철이 없어요, 또 철들고 싶지도 않구요. 영원히 철부지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세요? 특별히 인생의 멘토로 꼽는 분이 있다면?

저는 이장희 선생님을 참 좋아해요. 평소에 참 따뜻하게 대해주시면서 이런저런 조언도 많이 해주시죠.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이렇게 사는거야 라고 몸소 보여주시잖아요. 이장희 선배님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자신의 삶 앞에서 늘 당당한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제 꿈이죠.”

-스스로 완선씨의 전성기를 꼽는다면?

제 팬들은 제가 한창 활동하던 90년대를 전성기로 꼽으시겠죠. 그런데 저는 지금 이 순간이 전성기인 것 같아요. 나이가 주는 선물은 편안함인 것 같아요. 젊었을 때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소중해지고,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는 지금의 제가 너무 좋아요. 음악이나 무대도 제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서 좋구요.”

그녀의 외모는 데뷔 때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어느새 꽉찬 석류처럼 원숙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녀가 시작한 인생 2막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기대된다.

 

 

Posted by 오광수

한화고, 김성근 감독

 

 

 

                         연패에 시달리고 있는 김성근 감독.

 

 

 체육부에서 근무해본 적이 없어서 프로야구의 내부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김성근 신화의 지나친 맹신이 화를 부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몇 마디 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프로야구 팀을 한화와 그밖의 팀으로 나눌만큼 열성팬이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올 시즌을 시작하기 전 한화는 소위 전문가들 사이에 우승 후보로 꼽히던 팀이다. 동계시즌에 큰 돈을 들여서 전력보강을 했기에 팬들의 기대는 어느해보다도 높았다. 실제로도 연봉만으로는 프로야구 10개팀 중 단연 1위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지금 한화는 마치 성적만으로는 왕년의 삼미슈퍼스타즈를 방불케 한다. 20게임 가까이 치룬 지금 고작 3승이다. 모르긴 몰라도 한화팬들이 롯데팬이나 기아팬처럼 다혈질 팬(?)들이었다면 벌써 선수단 차에 계란 투척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화팬들은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이 김성근 감독이나 선수들일 것이라는 배려(?)로 화를 참고 있다.

 

 그 중심에 김성근 감독의 아집이 있다. 김성근 감독은 평생 쌓아온 야구인생이 마치 마무리투수가 무너지듯 고꾸라지는 현실을 바라보며 참담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키운 선수들이 감독이 된 팀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니 자존심도 무척 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임 이후 한화는 프로팀이 아닌 고교팀이 됐다. 매일매일 일정 수준에 올라오지 않으면 나머지 공부를 하는 열등생들이 돼서 지옥의 펑고를 견뎌야 한다. 마치 초일류 기업의 사원들이 삭발을 한 채 머리띠를 두르고 열공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까지 하다. 실적이 나쁘니 퇴근하지 말고 일하라는 회장의 지시를 받은 임원들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다. 물론 한화가 만년 꼴찌 팀이었기에 반등의 계기가 필요했지만 김성근 감독은 마치 야구 기초가 안돼있는 고등학교 선수들을 굴리듯 한화 선수들을 조련했다. 왕년에 만화가 이현세가 발표한 <공포의 외인구단>은 야구계에서 퇴출당한 퇴물들이 모여 신화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건 만화일 뿐이다. 그리고 한회선수들이 퇴물들도 아니다. 

 

 요즘 한화의 경기를 보면 패턴이 똑같다. 마치 재방송을 보는 것처럼 선발투수가 초반에 우르르 무너진 뒤 불펜투수들이 번갈아 나와 꾸역꾸역 막는다. 집중타는 터지지 않고 노아웃 만루에서 허무하게 끝나는 이닝들이 쌓인다. 그러다보니 덕아웃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초상집 분위기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몇 장면들이 생각난다. 우선 노장들의 영입이다. 김감독은 당장 오늘 쓰기 위해 미래의 자원들을 내주고 노장으로 분류되는 현재의 자원들을 데려왔다. 또 한화의 코치를 맡고 있던 장종훈이나 한용덕 등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줄줄이 팀을 떠났다. 그 대신 김성근 감독의 아들이 전력분석팀장으로 왔다. 마치 대기업 회장이 자신의 자식을 요직에 기용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또 팀의 주축투수인 로저스의 머리염색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아니 고등학교 야구선수도 아니고 프로야구팀에서 생긴 논란치고는 고약하다. 최근 일본인 코치의 이탈도 이례적이었다. 프로야구의 세계가 냉정한 실적의 세계라 해도 한동안 한화를 위해 헌신했던 한상훈 선수가 쓸쓸히 팀을 떠나기도 했다. 뭐 야구와 크게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김성근 감독이 청와대 초청으로 청와대 사람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었다. 

 

 아직도 한화의 성적이 나쁜 건 선발진 구성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김성근 감독은 그동안 뭘 했다는 말인가? 시즌에 맞춰 선발진을 꾸리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책임이다. 모든 선수들의 상태를 최적의 상태에 맞춰 시즌을 준비하는 건 선부들이나 코치의 몫이기도 하지만 최종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한다.

 야구는 '팀워크'와 '신바람'의 경기다. 지금 한화야구엔 이 두 가지가 없다. 안되다보니 선발로 나오는 투수들은 지나치게 긴장하여 볼넷을 연발하고, 잘 치던 타자들의 방망이가 결정적일 때 헛돌고, 수비수들은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다.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심정으로 애기하고 싶다. 앞으로 한 달간 감독 대행체제로 가자. 김성근 감독은 한 달 정도 쉬시면서 당신이 쌓아오신 야구에 대한 사색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전적으로 당신의 방법이 틀리다고 말하는 것 아니다. 그러나 김감독이 덕어웃에 앉아 있는 한 팀워크와 신바람을 기대할 수 없다. 잘 웃고 떠드는 정근우의 농담이 되살아나고, 로사리오 같은 외국인 용병들의 제스처가 커져야 한화야구가 살아난다.

 

 프로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키워야하는 절대절명의 책임감이 있다. 젊은 혈기 때문에 야구 말고도 관심이 많은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을 다루듯 하면 절대로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 언젠가 이 지옥같은 순간을 극복하고 한화가 반등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러나 시즌 초반 열성팬들이 받은 상처는 치유되기 힘들 것이다. 김성근 감독이 평생 쌓아온 야구에 대한 철학과 신념, 또 그가 보여준 성과보다 더 중요한 건 팬심이다. 이번주부터 마음껏 치고, 때리고, 달리는 신바람 나는 한화야구를 보고 싶다. 한 번 지고, 한 번 이기는 엎치락 뒤치락 하는 야구를 보고 싶다.

 

 야구를 개뿔도 모르는 문외한이 지껄여서 미안하다.

 

 

Posted by 오광수

 

 

 

 

 

김수현과 김은숙, 이순재와 송중기 사이

 

 

 

 

   송중기, 사진 KBS 

 

 

 

 

김수현과 김은숙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김수현 작가가 인기 드라마 작가로 군림하기 시작한 1960년대는 1973년생인 김은숙 작가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그런가 하면 이순재 선생과 송중기를 같은 반열에 올려 놓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 갓 서른살이 된 송중기에게 80세의 이순재 선생은 거의 할아버지 뻘이다.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얘기하려고 보니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 SBS 주말극 <그래, 그런거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은숙과 송중기의 드라마 <태양의 후예>, 김수현과 이순재의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는 정통과 모던의 충돌, 구세대와 신세대의 극단적 대비, 영화적 기법의 드라마와 전통적인 안방극장용 드라마의 전형들이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두 드라마는 작가와 배우의 무게감과는 달리 무려 20% 가까운 시청률 차이를 보이고 있다. <태양의 후예>30%를 넘어서 35%를 내다보고 있고, <그래 그런거야>는 이제 막 10%의 시청률을 넘어섰다. 작가와 배우의 무게감이 시청률과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사족부터 달고 시작해야겠다. 최근 방송 관계자와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태양의 후예>가 처음 기획되어 처음 문을 두드린 건 김은숙 작가의 출세작인 <파리의 연인><시크릿가든>으로 재미를 본 SBS였다. 그러나 SBS는 총 제작비 160억원의 대작인 데다가 처음 시놉시스가 현재 방영되는 내용과 달리 민감한 군문제를 다루고 있어 부담스러웠다. 결국 고민 끝에 <태양의 후예> 카드를 버렸다. 이 때문에 요즘 SBS 간부들은 경영진들로부터 <태양의 후예>를 놓친 데 대한 추궁을 당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결국 <태양의 후예> 제작사는 다시 MBC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MBC로서도 만만치 않은 제작비 등을 이유로 결국 포기했다.

  그사이 반전이 생겼다. 영화 <변호인들>로 천만영화 신화를 만든 영화사 뉴가 이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인권변호사를 전면에 내세워 대박영화를 만든 영화사 뉴는 정권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었다. 영화사 뉴가 잡은 건 투자를 받지 못하고 굴러 다니던 영화 <연평해전>이었다. 어떻게 하든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해서 <변호인들>로 인해 생긴 곱지않은 시선(?)을 피해야 했다. 어쨌든 <연평해전>은 보수우파정권의 전폭적인 지지와 조선일보 등의 아낌없는 기사 후원(?)에 힘입어 크게 성공한 영화가 됐다.

그런 영화사가 <태양의 후예>를 집어든 뒤 당연히 정치색을 지우고 멜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시작부터 중국이 투자한 영화이기에 중국당국의 검열에 걸릴만한 민감한 내용은 처음부터 지워나가야 했다. 그러다보니 송중기의, 중중기에 의한, 중중기를 위한 드라마가 됐다. 첫 시놉이 어땠는지 보지 않아서 짐작하기 힘들지만 처음 김은숙 작가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드라마가 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숙 작가가 전작에서 보여준 오글거림은 이 드라마에서도 여전하다.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말끝마다 애기야. 가자를 외쳤을 때 얼마나 오글거렸나. 독신남녀들의 사랑얘기를 다룬 <신사의 품격>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로맨틱 판타지였다. 영화사 뉴는 이 드라마 한 편으로 <변호인들>로 인해 지고있던 멍에(?)를 벋어던졌다. 또 드라마에 영화적인 기법이 많이 배어들어가는 바람에 충분한 볼거리를 만들어 내면서 드라마가 다이내믹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순재. 사진 tvN

 

 

 

  각설하고 김은숙에 비해 <그래, 그런거야>의 김수현은 리얼리티 드라마의 표준이다. 20명 가까운 대가족이 모두 다 주인공인 드라마이다 보니 원로와 중견, 신인에 이르기까지 투입된 배우들의 면면도 엄청나다. 이순재와 강부자를 비롯하여 김해숙, 송승환, 홍요섭, 노주현, 정재순 등 중견들. 게다가 남규리와 왕지혜, 서지혜, 신소율, 윤소이 등 젊은 배우들과 임예진과 양희경, 김정난 등의 감초들까지 풍성한 한정식집 메뉴 같다.

  드라마 속에서 다루는 사회문제도 거의 종합 일간지를 방불케 한다. 구직포기자를 내세워 N포세대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데릴사위, 맞벌이 문제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가 하면 딩크족을 통해 신세대들의 사랑법도 파헤친다. 여기에 저출산, 중년 재혼 문제, 노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안 건드리는 부분이 없다. 또 김수현 특유의 재치 넘치는 대사는 물론 구구절절이 공감을 자아내는 속사포 대사까지 역시 김수현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에 대해 누군가가 식상한 가족드라마라고 얘기한다면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20년전 시청률 50%를 넘나들면서 안방에서 히트한 김수현 드라마와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김수현의 유머는 예전보다 조금 더 깊어졌으며 잔잔한 감동도 예전 드라마들에 비해 농도가 짙어진 건 사실이다. 또 틈만나면 모자란 사내들을 등장시켜서 은근히 면박을 주던 김수현식 까칠함도 사라졌다.

  원로배우 반열에 오른 이순재는 또 어떤가. 예나 지금이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연기로 보는 사람들을 감탄케 한다. 후배 연기자들에게 연기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안방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이순재와 다른 점을 찾아보라면 선뜻 찾기가 어렵다. 

 

 <태양의 후예>로 돌아와 보자. 극중 송중기의 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어쩌면 돌 맞을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경직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군제대 후 오랜만에 돌아와 연기를 하려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구분하지 못한 연기가 잘생긴 얼굴과 캐릭터로 볼 때 옥의 티다. 거기에 상대 배역이 받쳐줘야 하는데 송혜교의 연기가 송중기를 받쳐주기엔 아직 미흡한 게 사실이다. 물론 회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하지만 말이다.

  드라마가 지나친 애국주의를 부추기고 군생활과 동떨어진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야 드라마니까 이해를 하고 넘어가자. 그라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개연성 없는 전개와 실소를 금치 못하는 장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슈퍼군인 송중기를 위해서 멀쩡한 도로에서 사고 내는 송혜교를 만들기도 하고, 낭떠러지에서 차와 함께 추락하고도 멀쩡하게 송혜교를 구해서 살아나온다. 극중 청춘남녀들이 하는 대사들을 듣다보면 순정만화에 나오는 대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어쩌랴. 세상 일은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 이미 순풍에 올라탄 돛단배를 멈추게 하는 방법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이 드라마가 국민 소득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킬러콘텐츠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만드는 이들의 입장에서 헷갈릴 수도 있겠다. 앞으로 어떤 드라마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이 자꾸만 모호해 질 수밖에 없으리라.

 

Posted by 오광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시인)

 

  






  지리산 노고단.  경향신문 사진부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어느날 그대가 지리산 등성 어디쯤서 예쁜 반달곰과 딱 눈이 맞는다면. 두말없이 마늘 몇 쪽 갖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녀석과 살림 한 번 차려 보시죠. 어느날 또 그대가 지리산 계곡 어디쯤서 날다람쥐 한 마리 만난다면 녀석과 쳇바퀴 굴리듯 한세상 돌고 도시든지요.

지리산 그 너른 품에서는 사람조차도 한 그루 나무입니다. 미물들 또한 모두 어엿한 사람입니다. 그곳에서는 네 편 내 편도 없이 그냥 어우러져 한세상 참 환하게 살아갑니다. 게서 제대로 지리산을 품고 싶다면 속세의 찌든 때는 잠시 벗어놓아야 합니다. 행여 물욕과 탐욕을 짊어지고 지리산에 간다면 성난 물줄기과 거센 비바람이 당신을 밀어낼 수도 있거든요.

대를 이은 반달곰 가족을 아무데서나 마주치고, 백년 묵은 산삼냄새로 그윽한 지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면 세상살이 정 견디기 힘들때만훌쩍 다녀오시지요. 게서는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연인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보듬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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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광수

 

말입니다. 너무 거슬리지 말입니다

 

 

 

 

 

 

 군에서 제대한 송중기를 앞세운 KBS 2TV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여심을 사로잡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6회 방영만에 30% 가까운 시청률을 올리면서 <별에서 온 그대>의 시청률을 넘어섰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유난히 거슬리는 말이 있다. 바로 말입니다.

 “그때 허락 없이 키스한 거 말입니다. 뭘 할까요 내가.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극중 특전사 대위 유시진 역을 맡아 열연 중인 송중기가 상대 역인 송혜교(강모연 역)한테 했던 대사다. 이뿐 아니라 드라마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모든 군인 배역들은 툭하면 말입니다를 남발한다.

 “말입니다는 군대에서 쓰이는 매우 특수한 은어 중 하나다. 대한민국 남자들이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군대에서 어미에 만을 쓰도록 되어있다. 요즘엔 <진짜 사나이>등 군대를 소재로한 예능 프로그램까지 등장하여 여성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그랬어요, 저랬어요만 써오던 군 졸병들에게 군입대와 함께 를 말끝마다 쓰기는 어려운 것이다. 일반 사회에서 쓰던 말버릇대로 를 쓰는 일이 많다. ‘라는 어미를 쓰지 않으려고 가 들어갈 자리에 대신 갖다 붙이게 된 것이 말입니다인 셈이다무리하게 어디에나 말입니다를 붙이면서 ……하지 말입니다……이거든 말입니다와 같은 문법을 파괴하는 형태의 말들이 생겨난 것이다. 송중기가 쓴 "키스한 거 말입니다"를 넘어 문법을 파괴하면서까지 드라마 속에서 쓰이고 있다.

 한때 군내무반을 무대로 제작한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이 용어를 써서 많이 거슬렸는데 이번에는 국민드라마 조짐을 보이는 인기드라마에서 남발된다. 이쯤 되니 군에서 쓰이고 있는 용어가 전 국민의 유행어가 돼가고 있다. 그나마 송중기가 쓰면 수려한 외모 때문에 멋있게 들릴수도 있으나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건 좀 곤란하다. 각종 연예기사의 제목에서도 유행어처럼 "말입니다"가 남발된다.  

 이와 더불어 일상 생활 속에서 거슬리는 말이 또 있다. 바로 "하실게요"다. "거스름돈 받으실게요""이쪽으로 앉으실게요"등 어딜가나 듣게되는 이 말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이또한 방송사의 모개그프로그램에서 써서 유행을 시켜놓은 말이다.

 여하튼 국민드라마 조짐을 보이는 <태양의 후예>에서 "말입니다"가 남발되는 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김은숙 작가님, 어떻게 좀 안될까요?

 하긴 사전제작 드라마이니 지금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중국에서는 이 말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엉뚱한 궁금증이 생긴다.     

 

 

 

Posted by 오광수

추자, 미조, 인희. 그녀들의 귀환

 

 

      가수 박인희. 경향신문 사진부

 

 

 

그녀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라는 시구처럼 그녀들이 거울 앞, 아니 무대 앞으로 귀환했다.

김추자와 정미조, 박인희. 사실 대중들로부터 한동안 잊혀졌던 그들이었다. 젊은날 각기 다른 색깔로 노래하면서 인기를 얻었던 이들 여가수들은 무려 30여년의 세월동안 대중들과 거리를 두고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살아왔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컴백한 것은 김추자였다. 70년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김추자의 인기는 대단했다. 소위 신중현 사단의 대표주자였던 김추자는 특유의 비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는 물론, 파격적인 의상과 섹시한 춤으로 젊은층들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마치 흑인 소울여가수와 같은 창법으로 신중현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소화했다. ‘님은 먼곳에’‘무인도’‘늦기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등 지금도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녀의 히트곡들은 김추자가 아니었다면 소화하기 힘든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미8군에서 노래를 시작한 뒤 신중현의 발탁으로 여가수로서 정점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75년 터진 대마초파동으로 은퇴 아닌 은퇴를 해야 했다. 더군다나 김추자는 박정희 정권이 대마초파동을 일으켜 가요계에서 퇴출 시키고 싶은 신중현의 사단에 있는 가수였으니 피할 길이 없었다.

19786월 서울 대한극장에서 5일간 열렸던 ‘78 김추자 리싸이틀은 활동 금지 처분을 받았던 김추자가 3년 만에 연 재기의 콘서트였다. 그녀는 이 무대에서 노래 못 하는 동안 정말 미칠 뻔했다면서 무대의상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춤과 노래에 몰입할 정도로 열정적인 공연을 보여줬다. 당대 최고의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비롯, 조용필·고 최헌 등이 게스트로 나왔고, DJ인 고 이종환씨가 사회를 봤다. 5일간 3만여명이 몰렸던 이 공연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빛나는 한 장면으로 기록될만했다. 최근 이 실황앨범이 음원으로 발매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으며, 700장의 한정판 LP로도 발매되어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지난해 열린 김추자 콘서트. 경향신문 사진부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3년 뒤 결혼과 함께 사라졌다. 그동안 부산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남편과 생활하면서 자녀들을 키워왔다. 지난해 김추자는 많은 올드팬들의 성화에 못이겨 34년만에 새 앨범을 내고 두 차례에 걸쳐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너무나 기대가 컸던 탓일까? 예전의 김추자의 폭발력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녀를 무대로 불러내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수확이었다.

 

올해 또 한 명의 여가수가 무대 복귀를 선언했다. 1970년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정미조가 그 주인공이다. 정미조는 1972년 데뷔한 뒤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개여울등을 부르며 톱가수의 반열에 올랐으나 1979년 갑작스런 은퇴 선언을 하고 가요계를 떠났다.

그녀는 팝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노래를 풍부한 성량으로 소화하던 대형 여가수 중의 한 명이었다.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긴 생머리를 전매특허로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미조는 가수로서 은퇴한 뒤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정미조는 프랑스 국립장식미술학교를 거쳐 파리7대학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92년 돌아왔다.

1993년 그녀가 수원대 미술대 서양화과 전임강사로 발령 받았다. 이후 지난해 정년퇴임할 때까지 정미조는 화가이자 대학교수로서 미술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왔다.

 

 

                                       컴백선언한 가수 정미조

 

 

 

 

 그녀가 대학에 교수로 임용됐을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경향신문 연예레저부(대중문화부) 소속 기자가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 그러나 대답은 노였다. 화가로서 금의환향한 그녀에게 가수 정미조를 떠올리면서 인터뷰 요청을 하자 가수 정미조는 잊어달라면서 화가 정미조로 나중에 인터뷰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그러나 가수 정미조를 빼놓고 그녀를 인터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때 가수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날렸는데 가수로서 호적을 팔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그녀도 복귀앨범을 내고 팬들과 만나고 있으며 37년만의 무대복귀를 예고하고 있다.

 

 

1970년대 혼성듀엣 뚜아에무아출신인 1세대 여성 포크 가수 박인희(71)35년 만에 국내 무대에 컴백한다. 공연기획사 쇼플러스는 최근 박인희씨가 올봄 박인희 컴백 콘서트-그리운 사람끼리를 개최한다며 가수 활동을 재개하는 건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35년 만이라고 밝혔다.

숙명여대 불문과 출신인 박인희는 1970년대 초 혼성듀엣 뚜아에무아로 활동했으며 1972년 솔로로 독립했다. 그는 모닥불’ ‘끝이 없는 길’ ‘그리운 사람끼리’ ‘세월이 가면’ ‘봄이 오는 길등 직접 작사·작곡한 곡으로 큰 사랑을 받으며 여성 싱어송라이터로서 활약했다.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그곳에서 한민방송 라디오 DJ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고국에서 노래를 발표하거나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 간간이 체를 통해 미국에서 사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지만 대중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졌다. 1994KBS 2FM <박인희의 음악앨범> DJ3개월 정도 국내 방송 활동을 한 것이 전부였다. 올해 5월 공연을 가질 것으로 알려진 그녀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그 풋풋했던 20대의 그녀들이 70대 초로의 나이가 되어 무대로 복귀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누가 그녀의 머리 위에 흰 눈을 뿌렸을까?

 

 

Posted by 오광수

 

 

 

 

신중현이 말하는 '미인' 탄생 비화

 

 

 

 

검열에 저항한 신중현과 엽전들의 2집앨범 재킷사진. 왼쪽부터 이남이, 신중현, 권용남

 

 

 

그 당시에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자주 다녔어요. 공연장마다 미인들이 많이 왔죠. 한창 젊을 때니까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미인은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로망이죠. 내가 자꾸 보게 되는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구나 해서 노랫말로 쓰게 됐어요.”

일흔살이 훨씬 넘은 노가수는 청춘의 한때 공연장을 찾아와 눈길을 끌던 미인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냈다. 그렇게 쓰여진 노랫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노랫말이라니. 748월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발표한 첫앨범의 수록곡 미인은 한국 록의 역사를 바꾼 노래가 됐다.

록그룹을 하면서 늘 우리네 정서에 녹아있는 한국적인 흥을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어요. ‘각설이타령을 듣다보면 슬픔 속에서도 풍자를 담아내서 듣는 이들을 사로잡는 여유가 느껴지거든요. 서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흥과 가락을 록 속에 녹여내는 작업 끝에 미인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졌죠.”

앨범 속에서 신중현은 서양에서 들어온 기타로 5음계만을 써서 경쾌한 기타 리프로 가야금이나 거문고 소리를 냈다. 8군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야전에서 닦아온 기타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중현과 엽전들이 단숨에 한국 록의 역사를 바꿨지만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애드포, 덩키스, 더맨 등의 밴드를 결성하여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른두살의 젊은 아티스트 신중현에게 가장 큰 불만은 팝을 우대하고 우리 가요를 천시하는 가요계 풍조였다.

“70년대만 해도 엽전들이 뭘 하겠냐?’는 자조적인 표현이 만연했어요. 그래서 내가 엽전이다. 엽전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오기로 그룹 이름을 지었죠. 또 엽전은 곧 돈이고, 그 생김이 참 예술적이잖아요. 서양돈과 달리 엽전은 한국적인 느낌도 강해서 제가 하려는 음악과도 잘 맞았죠.”

그가 영어식 그룹 이름을 버리고 결성한 엽전들에 베이스 이남이와 드럼 김호식을 영입한다. 그리고 지구레코드에 150만원을 받고 16개월간 전속가수가 된다. 그러나 신중현이 만든 노래들은 레코드사 대표인 임정수의 고개를 젓게 만든다. 러닝타임이 5분에 가까운 미인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수록곡들이 너무 길었고, 가요제작자도 소화하기 힘든 리듬과 멜로디를 담고 있었다.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로 비매품 1,000장만 찍었다. 그리고 또하나 중앙정보부의 검열이 신중현을 괴롭혔다.

그당시엔 내 노래라면 듣지도 않고 금지를 시켰어요. 당시에 중앙정보부의 끄나풀들이 아무런 절차도 없이 방송금지를 시켰죠. ‘끄나풀들도 대개 가요계 주변 원로들이었어요. 제가 찾아가서 항의도 해봤지만 소용없더라구요. 신중현은 뭔가 불온한 인물이라는 인식 때문에 미운털이 박힌거예요. 그때 비매품으로 찍었던 앨범은 대부분 폐기처분 됐어요. 레코드사도 갖고 있으면 무슨 일이 날까봐 없애버린거죠.”

 

 이 비매품은 지금 LP시장에서 1백만원을 호가한다. 정식 발매된 1집은 드러머 권용남을 새로 영입한 뒤 러닝타임도 줄이고 내용도 수정해서 내놓은 앨범이다. 이 앨범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팔려나갔다. 노랫말처럼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자꾸만 듣고 싶은 앨범이 됐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한 번 먹고 두 번 먹고 자꾸만 먹고 싶네, 구두닦이는 한 번 닦고 두 번 닦고 자꾸만 닦고 싶네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까지 등장했다.

지방의 판매업자들이 지구레코드에 몰려와서 찍어내기가 바쁘게 현금을 주고 사갔다. 정확한 기록도 없지만 1백만장이 넘게 팔렸고, 트로트 위주의 가요시장이 록밴드 시장으로 바뀌는 분기점이 됐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경식은 비매품으로 발매한 오리지널버전의 앨범커버의 추천사에서 한국의 로크(Rock) 뮤직은 있었던가? 한국의 로크란 과연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 앨범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삼천만의 히트곡이 된 미인을 비롯하여 그루브한 진행이 돋보이는 그 누가 있었나봐긴긴밤’, 펑크한 느낌을 담은 생각해’ ‘저 여인’, 7분여의 사이키델릭풍의 곡 떠오르는 태양등 명곡들이 이 앨범에 수록됐다.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과 달리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은 예륜’(藝倫, 예술윤리위원회)은 신중현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또 허름한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구사하는 그들이 혐오감을 주고,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괴롭혔다. 게다가 그 시절은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내려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폭압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신중현은 항복 선언(?)을 한다. 2집 앨범 수록곡이 이유도 없이 음반심의에 걸리자 장발을 자르고 건전한 내용의 노래만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요사에 길이 남은 2집 앨범(7510) 재킷사진이다. 세 명의 멤버가 고궁을 배경으로 단정한 머리에 정장차림으로 도열하여 근엄한 표정으로 45도 위를 바라보는 재킷사진은 항복선언이 아닌 독재정권에 감자를 먹이는 유쾌한 풍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은 7512월 가수 김추자, 같은 그룹 멘버 권용남과 함께 대마초가수로 낙인찍혀 구속되고 만다. 청와대로부터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고 국민의식을 고취하는 건전가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거절한 대가였다.

제가 대마초를 피운 건 60년대말 미8군 시절 한두차례였어요. 제집 근처에 삼밭이 있어서 동료 가수들이 와서 달라면 조금씩 나눠줬죠. 그런데 제가 구속되고 보니 대마초사건의 주범이 돼 있더군요. 결국은 권력자들이 불편해하는 제 노래의 확산을 막겠다는 저의가 담겨 있던 거죠.”

권력자들은 5년여 전 대마초를 피운 사실을 문제삼아 가수 신중현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켰다. 신중현 뿐 아니라 그가 관여해서 만든 김정미, 김추자 등 탁월한 가수들도 함께였다.

만약 1979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바명횡사하지 않았다면 신중현은 그냥 불운한 한 시대의 천재가 되어 박제된 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김추자와 김정미 등 좀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발군의 여가수들이 채 피지도 못한 채 현장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신중현이 감옥으로 가지 않고 좀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지형도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80을 바라보는 이 노장가수는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앞으로 10년을 목표로 인생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 모르는 음악작업을 하고 있다. 그 결과물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신중현이기 때문이다.

 

추신: 혹시 가수 김정미씨의 근황을 아시는 분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가요계를 떠난 이후 어느 매체에서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거든요.

Posted by 오광수

결국 마돈나를 못보고 말았다

 

 

                                                  허브 릿츠의 사진 마돈나. 허브릿츠 재단 제공

 

 팝스타 마돈나가 지난 4(현지시간) 대만 타이베이에서 월드투어의 일정으로 펼쳐진 <레벨 하트> 공연 도중 앙코르곡을 부르면서 대만 국기를 어깨에 걸쳤다가 논란을 불러왔다는 외신을 접했다. 일부 언론은 제2쯔위사태로 비견하기도 했다.

 지난해 마돈나가 새 앨범 <레벨 하트> 발표를 기념하며 10번째 월드투어에 나서면서 오세아니아, 아시아 지역 일정도 곧 공개할 것이라고 밝힐 때만 해도 그녀의 첫 내한공연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대만까지 오면서도 한국땅에는 오지 못했다.

 마돈나는 록그룹 U2와 더불어 내한공연을 하지 않은 마지막 팝스타로 꼽힌다. 그는 1985더 버진 투어이후 9번의 월드투어를 펼쳤으며, 이중에서 아시아 투어는 모두 6번이었다. 그러나 방문 국가는 일본, 이스라엘, U.A.E 단 세 나라 뿐이었다. 그녀와 필적할만한 비욘세나 레이디가가,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 등 세계적인 여가수들이 모두 내한 공연을 가졌다는 걸 기억해 낸다면 그녀가 한국땅을 밟지 못한 건 다소 이례적이다.

 과거에 마돈나의 한국공연이 무산된 데에는 심의문제도 있었다. 지나치게 외설적인 공연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면서 내한공연이 무산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공연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국공연이 성사되지 못한 주된 이유는 게런티였다. 1회 공연으로 게런티를 충당해야 하는 마돈나는 야외공연이 필수적이다. 적어도 잠실운동장 정도는 돼야 하는데 겨울철에는 불가능하고, 올림픽 체조경기장도 만석을 채워도 1만여 석에 불과하다. 어쩌면 다시 못 볼 마돈나의 내한공연이 계절적 요인 때문에 물 건너 갔다.

 아쉽지만 마돈나를 사진으로나마 만날 수 있는 사전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마돈나를 춤추게 한 허브 릿츠라는 카피문구가 인상적인 허브릿츠(1952~2002) 사진전이 그것이다.

 1980년대 중반 팝스타 마돈나는 신디 로퍼와 팝의 여제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1984년 두 번째 앨범 <Like a Virgin>으로 신디 로퍼의 아성을 누르고 새로운 섹스심볼로 떠오른 그녀는 세 번째 앨범 <True Blue>를 준비하면서 사진가 허브 릿츠에게 재킷 사진을 맡겼다. 사진 작가 허브 릿츠는 이전 앨범에서 섹스심볼로 어필했던 마돈나를 한 마리 백조처럼 우아하게 변신시켰고, 이 앨범 덕분에 마돈나는 팝의 여제 자리를 꿰찼다.

 2002년 에이즈로 허브 릿츠가 죽었을 때 마돈나는 “(그는) 말 한마디로 내 옷을 벗기고, 추운 모래밭에서 바보처럼 춤추며 뛰게 하는 사람이었다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허브릿츠는 마돈나를 비롯해 모델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퍼드 등 수많은 스타들을 렌즈에 담은 사진작가이다. 그는 1978년 아는 친구의 남자친구이자 무명 배우였던 리처드 기어와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가 고장 난 차를 배경으로 그의 사진을 찍은 것이 계기가 되어 유명 사진작가로 거듭난다. 마돈나는 물론이고 마이클 잭슨, 데이비드 보위, 톰 행크스, 미셸 파이퍼 등을 렌즈에 담았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마돈나의 섹시하거나 우아한 모습이 마돈나가 여전히 팝의 여제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Posted by 오광수

창고에서 잠자는 영화를 만든 까닭은?

 

 

 

  영화 <쿵푸팬더>의 포스터

 

내가 아는 후배 영화감독은 2년 전 아주 어렵게 영화 한 편을 찍었다. 그동안 총 4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바 있으니 영화감독의 이력으로는 크게 모자랄 게 없는 중견감독이다. 총 제작비 8천만원. 그것도 악전고투하여 모은 돈으로 제작한 영화다. 그런데 그의 영화는 영화제에 잠깐 선보인 것 외에는 세상 사람들과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물론 그의 영화가 수백억의 자본이 투입되어 빵빵한 스타가 나오는 그런 영화는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 우선 메이저시장에서 유통되는 영화들과는 분명히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여전히 실험적이다. 또 세상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도 마음에 든다. 그의 영화가 창고에서 썩어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어 보지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경향신문 212일자 기사를 보자.

 

 

< 설 연휴 기간 CGV 영화관 일부가 아이맥스로 <쿵푸팬더3>를 예매한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어 예매를 취소케 한 것으로 확인됐다.

영화관 측은 극장 사정으로 인해 <쿵푸팬더3> 상영이 어렵다고 말하며 취소를 요구했으나, 같은 시간 해당 상영관에선 <쿵푸팬더3> 대신 <검사외전>이 상영됐다.

11CGV 등에 따르면 지난 설 연휴 기간에 CGV 서울 상암, 천호, 경기 판교, 대구점 등에서 아이맥스관 상영 예정이었던 <쿵푸팬더3>를 취소하고 대신 같은 상영관에서 <검사외전>을 틀었다.

상영관들은 해당 시간대에 미리 <쿵푸팬더3>를 예매한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어 극장 사정으로 인해 <쿵푸팬더> 상영이 어려워졌으니 예매를 취소해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씨는 설날 당일인 지난 8CGV 대구지점에 <쿵푸팬더3> 아이맥스 관을 예매했으나 상영 시간 전에 영화관 측으로부터 예매를 취소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극장 사정으로 인해 상영이 취소됐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씨는 지난 9일 한 영화 관련 사이트에 글을 올려 상영관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서 취소해줬는데 나중에 보니까 월요일 하루종일 아이맥스관에서 <검사외전>을 틀었더라덕분에 아이맥스 이벤트도 놓치게 되고 <쿵푸팬더3>를 아이맥스관에서 못보게 될 것 같아 짜증이 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같은날 오후 610CGV 경기 판교에서 아이맥스 <쿵푸팬더3>를 예매했던 씨도 상영 시간 전에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씨는 영화관 측에서 그 시간대 이후 아이맥스관 점검이 있다며 예매 취소를 종용했다하지만 오후6시 이후로 검사외전을 틀더라. 정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CGV 관계자는 11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지난해 12월부터 올 1월까지 영화시장이 계속 안좋았다. 극장으로서는 <검사외전>에 관객들이 몰리니까 상대적으로 관객이 적은 <쿵푸팬더3> 상영관을 취소하고 아이맥스에서도 <검사외전>을 걸어 수익을 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상영관을 바꾼 것은) 본사의 결정이 아닌 각 지점의 결정이다. 고객들에게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보면, 황정민·강동원 주연의 <‘검사외전>은 설 연휴 기간인 6~10일 닷새간 전국1806개 상영관에서 45147회 상영되면서 4764038명이 관람해 매출액 점유율 71.5%를 기록했다. >

 

한 영화가 점유율 7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내 후배감독이 만든 제작비 8천만원짜리 영화가 극장에 걸린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렵다. 하긴 이땅에 영화감독들 중에는 데뷔작이 유작이 디는 감독이 수두룩하고, 이름만 영화감독도 수두룩하다. 지난해 가을에 그래도 이름 석자 알만한 영화감독이 3년간 극장에 걸지 못하고 창고에 방치됐던 영화를 개봉한다고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시사회에 간 적이 있다. 시사회를 보면서 극중 배우들이 스마트폰 대신 폴더폰을 쓰는 등 다소 어색한 장면들과 조우했지만 영화는 감독의 색깔을 분명히 보여줄만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시사화 이후 그 영화를 내건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양성이 실종된 영화계 풍토를 한탄해야 할까. 아니면 블록버스터와 스타만 선호하는 관객들의 취향을 탓해야 할까. 아니다. 이는 천박한 자본논리에 빠져있는 영화계의 현실 때문에 고나객들은 다양한 영화를 감상할 기회조차 빼앗긴 것이다. 그 때문에 그저 멀티플렉스가 골라준 영화를 보면서 똑같은 맛이 팝콘이나 먹어야 한다. 어쩌다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헤매고 헤매면서 예술상영관을 찾거나 그도저도 안되면 다운로드라도 해서 스마트폰으로 감상해야 한다.

이미 몇몇 영화배우들은 권력이 됐다. 투자자나 제작자, 영화감독은 그들의 앞에서 처분만 기다린다. 그들에게 점지돼야 비로소 신천지가 열린다.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을 계속해야 할까.

Posted by 오광수

일어나라, 조덕배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tvN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덕선과 택이가 키스신을 연출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환적 분위기에서 펼쳐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맞춤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애틋하게 만들었다. 그 장면에서 흐르는 노래가 조덕배의 명곡 꿈에였다.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 / 이름 모를 너를 나는 못잊어 /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 지난 꿈 스쳐간 여인이여 / 이 밤에 곰곰히 생각 해보니 / 어디선가 본 듯한 바로 그 모습 /

떠오르는 모습 잊었었던 사랑 / 어느 해 만났던 연인이여 / 어느 가을 만났던 사람이여 / 난 눈을 뜨면 꿈에서 깰까봐 / 나 눈 못뜨고 그대를 보네 /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여 / 오늘 밤에 그대여 와요.‘

 나는 젊은 청춘 남녀의 키스신 때문이 아니라 조덕배의 노래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면서 눈물이 났다. 조덕배, 그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옐로 보이스다. 또 보이스 자체가 듣는이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고, 몽환적인 상상 속으로 이끈다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박진영이 얘기하는 "공기반 소리반"의 전형이 바로 조덕배의 보이스가 아닐까.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들으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조덕배다.

2 000년대 초반경이었던가. 그당시 미사리의 카페에서 노래하던 조덕배씨가 전화를 했다. 당신 집에서 소주 한 잔 하자는 거였다. 그당시 내 집은 강북의 끝이었고, 조덕배씨는 일산에 살고 있었다. 야심한 밤에 부담되는 초대(?)였으나 그분의 매니저 차를 타고 일산까지 갔다. 일산 그의 아파트에 도착하니 이미 새벽 한 시. 거실에는 돼지고추장구이를 주메뉴로 하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의 아내가 새벽 불청객을 마다하지 않고 마련한 상차림이었다.

 우리는 일상적인 얘기를 나눴다. 조덕배씨는 제대로 결혼식조차 못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전세로 싸게 들어온 아파트 얘기도 했고, 자라는 애들 이야기도 나눴다. 권커니 작커니 몇 순배 술이 돌자 그가 기타를 잡았다.

 나는 그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약간의 취기가 동반된 결과이기도 했지만 조덕배의 신산한 삶이 묻어난 노래는 듣는이의 가슴을 쥐고 흔들었다. 더군다나 온 세상이 적막강산이 된 새벽 두 시 듣는 노래는 더욱 특별했다. 내 생애 최고의 콘서트에 초대된 셈이었다. 그날 나는 취한김에 다시는 대마초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다짐과 좋은 노래를 만들어서 불러달라는 요구까지 한 뒤에 그집에서 나왔다.

 그로부터 10년뒤 조덕배의 뒤늦은 결혼식에 갔다. 강남의 한 웨딩홀이었고 그는 아내에게 뒤늦은 면사포를 씌워주었다. 신해철과 박상민 등 가수 선후배들이 그의 뒤늦은 결혼식에 함께 했다.

 그런데 그 뒤에 들려오는 소식들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 뿐이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와 싸워야 했고, 또다시 대마초로 구속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아내와 이혼법정에 서야했다. 나는 그가 그런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약에 의지해서 좋은 가수 한 명이 망가져가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또 그를 끝까지 감싸주지 못하고 떠나는 부인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예전같은 목소리로 그가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시련이 좀더 단단해지기 위한 단련의 과정이라고 믿고 싶다. 언젠가는 그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회복하여 다시 좋은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주리라 믿는다.

Posted by 오광수

김광석과의 마지막 인터뷰

 

 

 

 

 

                                대구 김광석거리, 고 김광석의 동상. 경향신문 사진부 

 

 

 

 19958, 대학로 학전소극장. 불과 200석 남짓의 소극장에 발디딜 틈없이 관객들로 가득찼다. 보조의자에 앉아서라도 공연을 보겠다는 팬들의 성화에 작은 소극장의 계단에도 보조의자가 놓여졌다. 객석의 관객들은 20대와 30대 초반이 주류를 이뤘고, 남성팬보다는 여성팬들이 훨씬 많았다. 그때 김광석은 소극장 1천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앞두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조명이 밝아지면서 그가 하모니카 전주를 시작했다. 술렁이던 객석은 이내 조용해지고 하모니카 소리보다 더 슬프고, 아름답고, 때로는 힘이 넘치는 김광석의 노래가 이어졌다. 대부분 김광석의 열혈팬이었지만 처음 그의 라이브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김광석의 무대 카리스마에 질려 연신 탄성을 내지른다. 그가 떠난지 스무해. 때로는 턴테이블에 LP를 얹고, 때로는 CD로 그의 음악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라이브무대서 듣던 그의 노래를 결코 잊을 수 없다. 1천회의 대기록이 말해주듯 김광석은 라이브 무대에서 관객들을 휘어잡는 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마치 혁명 전야처럼 조용하고 부드럽게 시작하여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의 노래를 듣다보면 피가 뜨거워지면서 가슴이 뛰곤 했다. 가수도 아니면서 김광석이 아니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의 목소리를 질투하기도 했다. 그가 다시부르기 시리즈를 통해 되살려낸 노래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부르면 곧 역사가 됐다.

 벌써 20주년. 20년 전에 기자는 공연을 끝내고 땀범벅이 된 김광석을 학전 소극장의 좁은 대기실에서 만났다. 그것이 그와 가졌던 마지막 인터뷰였다. 그날 김광석은 참 씩씩했다. 1천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해냈다는 만족감에 들떠 있었다. 그날 인터뷰 내내 했던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전인미답의 2천회 기록에 도전하겠다는 것이었다. 1천회를 무사히 마친 그였기에 그의 도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가면서도 음악얘기나 무대얘기를 할 때면 눈을 빛내면서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런 김광석이었다.

 19961. 그의 부음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사고사나 병사가 아닌 자살이라니. 그와 친분이 있던 가수나 매니저, 혹은 음악동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장에 와서 절대 자살할 리가 없다면서 울부짖었다. 김광석은 죽기 전날 저녁 친구 박학기와 술을 마셨다. 김광석이 한 잔 더하자고 했지만 박학기가 다른 약속이 있어 아쉽게 헤어졌다. 그가 마포구 서교동에 있던 집에 귀가한 시간은 자정이 넘은 030. 그는 부인 서모씨와 맥주 4병을 나눠마셨다. 그리고 부인이 안방에 들어가 비디오를 보는 사이 전깃줄로 목을 맨 것이다. 그당시 김광석은 대학로 라이브극장에서 20여일에 걸친 콘서트를 앞두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이 더 안타까워 했다. 어쨌든 경찰은 자살로 최종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20년이 세월이 연꽃 스치고 가는 바람같이 빠르게 흘러갔다. 해를 더할수록 김광석이 더 뚜렷하게 우리 시대의 선굵은 벽화로 각인되는 것을 보면 하늘나라의 그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1996년은 가요담당 기자로서 정신 없는 1월을 보냈다. 벽두부터 가수 서지원이 자살했으며 이어 김광석이 자살소긱이 이어졌고, 숨도 돌리기도 전에 서태지가 은퇴선언을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죽음이나 은퇴를 둘러싼 제보들과 정황들을 확인하느라 정신없이 전화기를 돌렸던 기억이 새롭다. 하루는 장례식장으로 하루는 은퇴 기자회견 장으로 뛰어 다녔다.

 그러나 이미 그 많은 이야기들이 벽화 속으로 걸어들어가 신화가 돼가고 있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점점 더 멀어져 가고있지 않은가. 그래도 그의 노래는 더욱 선명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김광석은 축복받은 가수다.  

Posted by 오광수

최인호세대와 이생망사이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요즘 유행어 중 하나가 이생망’(이번 생애는 망했어)이란다. 그런데 이 유행어의 근원지가 20대 청년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보이스 비 엠비셔스(Boys be ambitious)’를 외쳐도 모자랄 젊은층들 사이에서 이처럼 자괴적인 말이 유행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일이다. 그 대부분의 책임은 나와 같은 기성세대에 있다는 건 피할 수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위로를 한들 삼포세대인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통할 수 있겠는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빛나는 청춘의 한때를 구가했던, 지금은 고인이 됐거나 장년층에 접어든 그네들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밥 세끼 먹기가 쉽지 않았던 70년대에 불같은 열정으로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한때를 구가했던 선배들의 청년시절 이야기가 절망에 빠져있는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까 싶어서다. 또 그들의 삶을 되짚으면서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작은 힌트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70년대 청년문화를 통기타와 청바지로 정의한 건 문학평론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병익 선생이었다. 그 김병익 기자가 청년문화의 기수로 꼽은 이들 중에 작가 최인호와 영화감독 이장호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가수 이장희는 두 사람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이들은 70년대 <별들의 고향>이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내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청년문화의 기수였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그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추운 자취방에서 글을 쓰거나 노래를 만들면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철저하게 무명의 청년들이었다.

 

 서울고등학교 동창인 세 사람은 최인호와 이장호 감독이 동기동창이었고, 이장희는 2년 후배였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온 이는 최인호였다. 최인호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한 천재소년작가였다. 그당시 중앙일보 문화부에 근무하던 정규웅씨의 증언에 의하면 교복입은 최인호가 걸어들어와 신춘문예 입선했다는 통지를 받고 왔다고 얘기했을 때 누군가의 대리인으로 심부름 온 줄 알고 본인이 직접 오라. 대신 오는 건 안된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그런 천재작가도 빛을 보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최인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처음 소설의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지만 신문사 간부가 조간신문에 재수없게 무덤이라니. 다른 이름으로 고쳐봅시다라고 얘기해서 <별들의 고향>이 됐다